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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하당(柳河堂)=칼럼니스트 |
| ⓒ 완주전주신문 |
해 바뀌니 새삼스러운 생각. 길게 늘어진 세월 한 토막은 현실, 기타는 추억이다. 시골 안채 초가일망정 기둥 사이 멀어 방·마루가 넓고, 행랑 4칸 마당 들어서면 그리 초라하지 않았으며, 집 옆 개울은 여인들의 빨래터로 내 건너 멀리서도 보였다. 마루에 앉아있으면 울타리 넘어 방망이질과 깔깔 거리는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귀에 들어섰다.
어느 해였던가 노랑 은행잎 유별나게 환했던 석양 덩실한 언덕을 꼴딱 넘어 너른 냇가에 이르니 혼자 빨래 나온 처녀 초등학교 1년 후배 K양이 있지 않나.
모르는 체 지나치니 아! 깜짝 놀랄 말 “오빠라 부르리까!” 수백 번 생각 망설이다 내는 폭탄 발언이 분명하다. 그러나 남녀유별 엄격하던 시절 즉답 줄 형편이 아니라 못 들은 척 스쳐 지나갔으나, 그날 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 못 이뤘다.
당시 서로 좋으면 연애! 결국 부부되는 사람들 있었으니 이 망상까지 기어올랐다. 그런데 그 집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 형제 숙부 드높은 장벽 넘어서기 어렵다는 판단과, 만일 연애 소문나면 얼굴 못 들고 다닌다는 겁에 질려 대답이 어려웠다.
△20년 세월이 흘러 부인들끼리의 ‘계(契)모임’ 얘기가 들렸고, 얼마 후 부부동반이란다. 그럴 수 있어 나갔던바 아! “오빠라 부르리까?” K 씨가 거기 있어 서로 깜짝 놀라 한 10초 동안 불타는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오빠 소리’ 떠올랐고, 몇 잔 술에 얼굴이 붉어지자 놀란 아내 물수건으로 연신 훑어낼 때, 꿀물이라며 내미는 K 손과 마주침 금방 구운 붕어빵만큼이나 뜨거운 체온을 느꼈다.
△여인들은 정보통. K씨 새 집을 짓는데 바닥공사 철근 깔아 야무지게 한다는 소리가 들려 ‘그러고도 남을 여자 그럴게야!’ 고개를 끄덕이었고… 그런지 3-4년 뒤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느 날 “라면 다 끓었으니 식기 전 어서 드시오.” 아내의 재촉에 냄비뚜껑을 열자 김 푹 솟으며 신라면 냄새 구미를 돋운다. 쇠 젓가락으로 집은 라면 발 스르르 반은 미끄러져 내리고, 반만 입에 들어가기를 반복…, ‘오빠소리…’ 답장 원고지 몇 장에 “우리 둘만 알고 영원히 간직하자” 맹세했던 생각에다 ‘나와 결혼했더라면 죽지 않았을 수도…’ 망상이 떠올라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때 처 내 얼굴 바라보며 “왜 그러시오”묻는다.
잘 먹어 배 불쑥한 김에 처 손을 잡으니 마디 굵고 뻣뻣한 손등 쭈글쭈글 핏대만 튀어나왔다. 허리 굽은 몸 라면그릇 치우는 모습을 보며 거슬러 올라가 젊어서의 미모 K 씨까지 연상 서글픈 생각이 치솟는다.
지팡이 짚고 은행잎 유독 짙은 그녀 집 앞을 거쳐 옛 빨래터에 이르면 ‘오빠…’ 그 소리 떠오르고, 혹 그의 무덤 지나는 봄날이라면 백합 한 송이 놓고 싶다. 이 맘 노인 ‘망상누출증’인줄을 알며, 잡스러운 허한 생각 저 혼자 안고 젊은 날을 서성인다. 닫혀버린 마음 열어 보인다.
/ 유하당(柳河堂) = 前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