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대문 밖 너른 마당(338회)-통합 743회 : 경천면 용복리 세상에 이런 면

admin 기자 입력 2021.07.02 08:59 수정 2021.07.02 08:59

경천면 용복리 세상에 이런 면

↑↑ 이승철 = 칼럼니스트
ⓒ 완주전주신문
경천리-가천리-용복리 세 부락(법정)이 경천(庚川)면이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지명총람』에도 들어있지 않다. 부락 셋에 ①대석골 물 ②신흥골 물 ③화암사골 물 ④구제골 물 이 네 마디면 설명도 끝이다. 그러나 듣고 묻는다면 이야기는 계속 된다.

신흥골이 가장 깊어 △귀신 △도깨비 △사나운 짐승이 많아 천하장사도 선뜻 들어가기를 싫어했다. 가장 무서운 짐승이 여우이다. 송장을 파먹으며 오래된 수미호(九尾狐)는 사람으로 변신하여 넋을 빼앗기에 당시 욕으로 미운 사람에는 ‘신흥 가서 돌아오지 못할 놈!’이라 했다. 신흥 가운데 먹방이(먹뺑이)가 더욱 깊어 고산지역 최고의 오지(奧地)로 지칭됐다.

△먹방이에 아버지도 눈이 하나(장애) 아들도 하나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밖에서 눈 둘인(성한 눈) 사람이 오자 부자는 깜짝 놀라며. “허허허! 이 세상에 ‘눈 둘인 사람이 다 있다’며, 보따리를 싸 들고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또한 신흥 먹방이 부자가 고산 장에 가기 위해 ‘먹방이’를 나서 가천에 이르니 아들이 하는 말 “아부지 세상 이렇게 넓은 디가 다 있어유우.”, 아버지 “저 아래에 가면 더 널은 디가 있다.”

부자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삼기면(지금 고산) 삼기리에 이르렀을 때 아들의 말 “아부지! 시장 아부지 혼자 다녀와요. 나는 무서워 더 이상 못 따라가겠시유” 오던 길을 확 뒤돌아섰다. 아버지도 아들을 위해 뒤돌아섰다. 집에 도착 한 아들은 “아부지 이렇게 편한 디가 있는 디 장은 무엇 하러 가유?”

△1965년 큰 재판이 있었다. 산주(박씨)는 1950년 봄 임야를 팔았는데 산 사람 을은 곧 전쟁이 일어나 나무 한 그루 베지를 못하고 있다가 종전을 맞았다. 을은 작업을 하려 산에 들어서니 산주의 말 “임목 1950년에 팔았고, 지금까지 나무 베어가지 않은 건 당신 개인 사정이었으니 이젠 못 벤다.” 희대의 재판이 벌어졌다.(승부 생략)

△전쟁은 참혹했다. 먹고 살기 위해 톱·도끼를 메고 들어가 닥치는 대로 도벌했다. 이러던 골짜기를 이제 보니 ‘난 가발이다’, ‘그게 아니다’ 시비가 심한 걸로 소문이 났다. 신흥이 새롭게 일어서는 것 좋으나 시비는 없기를 바란다.

수리시설에 묘수(妙手)가 있다. 1930년대 초 경천저수지를 만들며, 굴을 뚫어 경천 물을 모두 끌어들이고, 수문관리 때면 물고기를 가마니로 잡았다.

용복 가천은 건천(乾川) 말 한 마디 못하고 살았다. 냇가에 대추나무를 심어 대추가 특산물이다. 들녘 사람이 “대추나무 뭣 먹고 자라오?”, 주인 대답 “자갈이 오줌 싸 그 것 먹고 살지요.” <완주독립기념관!> 군민이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17번 국도 새 터널 이 지역의 명물이다.


/ 이승철 = 칼럼니스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저작권자 완주전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