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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대문 밖 너른 마당(522회-통합 927회) : 20,000명 이긴 김춘배 의사

admin 기자 입력 2025.07.11 10:01 수정 2025.07.11 10:02

↑↑ 유하당(柳河堂)=칼럼니스트
ⓒ 완주전주신문
김춘배를 잡으려고 19일 동안 경찰·민간인 2만 명(16반 조직)이 대들었으나, 양손에 권총을 들고 빵빵 쏘며 그들의 애간장을 서늘케 했다. 김춘배는 체력이 튼튼한 마라톤 선수로 담력이 대단하며, 판단력이 번갯불 같았다.

연봉암 최응룡(48) 스님에게 고약을 사달라고 부탁한 그 결단 ‘불교계의 살생유택(殺生有擇), 계율을 알기에 동족끼리 고발하겠나!’ 이런 판단과 믿음이 있었다.

1934년 10월 10일 냇가에 이르렀으나 물 깊이를 모르는데, 마침 지방사람 이원극을 만나 그의 등에 업혀 물을 건넜고, 집에 따라가 조반을 해결했다. 주인의 말 “어젯밤 요 앞집에 제사가 있었으니 떡을 얻어다 드리리다.” 믿고 보냈다. 얼마 전 업혀 등·배 서로 닿은 동포이니 응낙했던 게다.

일본인 동대문경찰서장의 글 『괴도(怪盜)』에 김춘배는 대담-민첩-용감-지략-사격술-전광석화-신출귀몰-동에 번쩍 서에 번쩍(東驅 西馳)한다고 표현했다.

북청을 중심으로 하루거리 80리 둘레를 에워싸고 명태잡이 철인데도 배 한 척 못 뜨게 출어금지령을 내렸다. 이 정도라면 이긴 싸움 아닌가.

경비대나 체포조원을 만나는 경우 “나 김춘배다.” 이러면 사시나무 떨 듯 할 때 안심시키고, 그 중 몇 사람을 앞세워 10리쯤 위험지역을 벗어나면 돈 몇 원씩 줘 보냈다. 쫓기는 몸이지만 이런 의리로 다져진 인물이다.

범인(?)은 십중팔구 아는 사람을 피하는 편인데, 김춘배는 고향 삼례에 갈 수 있는 기차에 올라 탄 담력 그 계략 역시 대단했고, ‘3만원’을 얻어갈 자신이 있는 거물이었다. 고향 찾아 나선 그 행적 삼례 분들 잊어선 아니 된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3만원을 챙겨 목표대로 만주로 되돌아가 1912년생 김일성을 만났더라면 남북한 해방 정국의 역사가 뒤바뀌었을 것이란 가상도 해본다.

1934년 11월 2일 함흥검사국에 넘겨져 9일까지 취조를 마치니 그 기록 1만 장이었고, 11월 26일 오후 3시 35분 ‘무기징역’이 언도됐다.

삼례 영신학교 4학년 때를 기억하는 김재중 학교장은 “팔팔하고 강직한데다 사물을 접하면 모두가 감정적으로 과격한 편이 많았다”고 서울서 내려온 조선일보 기자에게 말했다.

우리는 편견 없이 역사를 들여다봐야 한다. △3·1운동 때의 유관순 기억할 것이고, 그 기념 추모사업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본 사람은 잘 안다.

△간첩 체포 작전에 나섰다가 죽은 전주고등학교 출신 소병민 중령 동상은 모교 정문 곁에 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 기념관 건립 이야기가 솔솔 피어오른다.

△완주 역사 신라 때부터라고 들어내는 분들마다 완주는 흉상 하나 못 만들어 세우는 그 옹색함을 뭐라고 변명할 겐가? 발기인 3천 명 안에 성명 석 자 못 올리면 부끄러운 일이다. 인구수가 문제 아니라 일꾼 부족이 한이다.

/ 유하당(柳河堂) = 前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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