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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하당(柳河堂)=칼럼니스트 |
ⓒ 완주전주신문 |
△일본 궁성현 석권시(宮城縣石卷市)에서 한국인 보기에 뜻 깊은 전시회가 열렸는데, 한국에서 일본인이 맨 처음 ‘건국훈장’을 받은 후세 다쓰지 변호사(布施辰治 弁護士:1880-1953)소장품 전시회이었다.
2017년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렬(朴烈』)에서 박렬·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부부를 변호하여 인상 깊었던 일본인 변호사가 후세 다쓰지(布施 辰治)이다.
후세 다쓰지는 1919년 2·8독립선언 모임에 참여한 ‘재일조선인 유학생들’ 중 ‘국가 전복 모의’ 용의자로 몰린 박렬·김자 부부 변론을 했다. 일본인·조선인 국적을 따지지 않고 ‘인권옹호’에 힘쓰던 후세 다쓰지는 1932년 법정 모욕으로 몰려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는 시련도 겪었다.
한국 정부는 2004년 후세 다쓰지에게 건국훈장 애국장(建國勳章 愛族章)을 추서했다.
후세는 1946년 박렬 열사에 관한 책을 집필했다. 『운명의 승리자 박렬』이란 제호의 책인데, 자료 보관실에는 ‘초고와 초판 인쇄본’이 보관 돼 있다. 초고만 봐도 ‘조선 독립운동에 경의가 솟아나고, 일본의 조선 침략 속내를 생각나게’한다.
후일에 다쓰지는 이 내용을 일제 강점기 『신조선(新朝鮮)』이란 잡지에 싣자, 일본 검사국은 그 본뜻을 밝히라는 취조를 단행했다.
(…)자료 보관실에는 초고와 함께 박렬·가네코 후미코 부부 및 ‘의렬단원’과 조선인 무료변론 당시 모았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관련된 ‘전라남도 나주군 궁삼면’ 토지 수탈 반항운동 당시 자료와 △서울·대구 순회강연 자료도 있다. 일제에 대항하여 활동한 후세를 당시 조선인들은 ‘우리들의 변호사’라 불렀다.
(…)5000여 점 방대한 자료를 공개하는 담당자는 ‘지금부터 새로운 전시를 위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한다. 9월 13일은 후세의 기일. 그의 현창비가 ‘석권시(石卷市)’ 주택가 교회 부근 작은 공원 가운데 있는바 매년 여기서 추도회를 연다. ‘布施辰治 顯彰會’ 회장 松浦 健太郞 변호사는 ‘일본 법조계에서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현창비에 새겨진 후세의 좌우명은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生きべくんば 民衆と共に),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死すべくんば 民衆のために)’이다.
2004년 후세 다쓰지는 일본인 최초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았다. 전 생애를 걸고 일본 폭압과 횡포에 맞서 싸우며 조선 민중을 위해 헌신한 후세 다쓰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의 희생적인 삶을 통해 한·일 양국의 진정한 화해를 이룩할 수 있는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재일조선인 유학생 600여 명이 ‘조선청년독립단’ 이름으로 독립투쟁의 의지를 천명하는 ‘2·8독립선언’이 있었다. 대한독립이 외국인 도움으로 어디서 굴러온 게 아니다. <참고자료: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2012.3.1 방송) http://history. kbs.co.kr/>
/ 유하당(柳河堂) = 前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