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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철=칼럼니스트 |
| ⓒ 완주전주신문 |
화산, ‘빛날 화(華)’자를 써서 ‘화산(華山)’이라 부르면 ‘꽃 산이요’, ‘화산(崋山)’으로 쓰면 ‘산이 거듭 이어짐’이다.
산에 가면 꽃 있어 ‘화산(華山)’이 맞고, 오나가나 이어지는 산줄기이니 ‘화산(崋山)’ 역시 그럴듯한 표기이다.
산 저편으로 가는 경우 낮은 데로 길이 나 넘는 곳을 ‘재(고개)’라 한다.
‘말목재’ 넘으며 충청도로 ‘공충도(公忠道)사람’ 넘나들었다. ‘만목치(萬木峙)’, ‘만목치(晩木峙)’ 같은 재이다. 왕주(王酒)받으러 논산 갈 때나 충청인 매운탕 먹으러 고성리(古城里) 올 때 여기를 넘는다.
만목재에서 가까운 마을이 ‘석천’. 매찰에서 시집오고, 가마재 양반이 장가들면 친정 처가 외가를 향해 부지런히 넘나들었으나 이젠 걸어 넘는 사람이 드물고 누구나 자동차로 쉬 오간다.
진안군 용담면 대불리 주민은 고산장을 보는데 소금 한 통(가마)을 지고 ‘싸리재’를 넘어야 장정 소리 들었다. 싸리재를 한자로 ‘杻嶺’이라 쓰고는 읽기를 ‘축령’이라 하는데, 제대로의 발음은 ‘유령’이 맞다.
봉동읍 백제대학 앞 재를 ‘솔티’재라 하고 한자 표기는 ‘송치(松峙)’이다. 이러나저러나 소나무가 주제이고 근처 진천송씨 종산 소나무 가운데 땅에서 2m쯤 올라가 세 갈래로 뻗어난 솔을 송씨네는 ‘삼정승(三政丞) 소나무’라 자랑스러워한다.
옛 지도에 ‘애구(隘口)’라 표현이 있는데, 이치에 맞는 절묘한 지칭이다. 관에서 볼 적에 이 고을에서 저 고을로 오가는 출입로임에는 틀림이 없다. 전쟁 때 ‘재를 지켜라’가 아니라, ‘애구(隘口)를 막아라.’이었다. 들고 나는 출입구 개념인데 그 특징은 좁고 험하다는 데 초점이 있다.
비봉에서 여산 넘어가는 재는 ‘벌치(伐峙)’. 여기도 애구로 ‘목을 베라’, ‘처라’, ‘공격하라’는 뜻으로 살벌하다. 지금은 보편적으로 ‘누운두루미’재라 하는데, 표기에는 ‘문치(門峙)’로도 나온다.
오도재를 뚫어 고산↔소양을 쉽게 오가야하고 고속도로로 이어져야 한다. 곰치재하면 임진왜란 때의 웅치전투 얘기까지 이어지며, 소양면에서는 전적비 자리를 두고 마음이 편치 않다.
진안에서 창렬사를 세워 8월 13일 정담 장군 외 무명용사의 제사를 하는데, 황박(黃璞) 의병장 후손들이 근래 참여하며 위패 대신 초상화로 하자는 제의를 하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현충사나 다른 사당에도 초상화가 있어 들을만한데 양쪽 생각이 다르다.
고산 서봉의 ‘누운기러기재(관덕↔이전리)’의 다른 이름이 ‘비안치(飛雁峙)’이다. 우리들 보기에 누워있는 형국은 ‘낮음’을 의미하여 와룡(臥龍), 와우형(臥牛形)이 많다. 어우리 뒷산 역시 누워있는 소 형상이라 해서 지명이 ‘어우리(於牛里)’란다.
소향리 새재 너머는 산중 호수가 절경. 운암산 아래에 유람선을 띄우면 큰돈이 벌릴 터인데 왜 망설이나. 중국 서호(西湖) 못지않은 돈 방석인데도….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
완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 (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