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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철 = 칼럼니스트 |
ⓒ 완주전주신문 |
지금 한국을 어찌 보면 역사의 어둠 시대입니다. 『통감(通鑑)』,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등 역사책 읽는 사람이 적고, 대학교에서 역사과가 폐지되기도 합니다. TV 사극방영도 줄었거나 방영 시간대가 밤중이라 보는 사람이 귀합니다.
6·25전쟁 중 고산 사람들에게 가장 큰 손실이 거사비(去事碑)의 사라짐입니다. 이리하여 1,500년 고산 내력의 이해가 어렵습니다.
■1593년 임진왜란 중 신경희[申景禧: ?~1615년(광해군 7)]가 고산현감으로 왔는데 정치를 아주 잘못했습니다. 지금은 군수·시장 우리 손으로 뽑으니 망정이지 신경희 닮은 사람 군수 되면 큰일이지요.
△신경희는 권세가의 자제입니다.(임진왜란 때 조령 못 지킨 신립 장군 조카) △욕심 많고 포학했으며 △불법을 저지르고 △전쟁 중 군령(軍令)도 받들지 않았습니다. △삼례역 찰방(察訪/윤길:尹趌)]과 짜고 하루에 50인을 제멋대로 죽였답니다(이광 행장 이식 글). 봉동 정자나무 아래 사형 터 전설과 연관시켜 볼만 합니다.
이러고도 벼슬길은 빳빳하여 높아졌으나, 1615년 양시우(楊時遇)·김정익(金廷益)·소문진(蘇文震) 등과 반역을 모의 ‘능창군(綾昌君) 이전(李佺)을 추대하려했다’는 무고로 결국 장살(杖殺:때려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남선(南銑:1582∼1654)은 고산현감을 두 차례(1727, 1629년)나 했습니다.
▲폐단을 말끔히 쓸어내고 ▲자기에 대한 대접은 간략하게 줄여 제 일은 스스로 챙겼으며 ▲은혜와 위엄이 행해졌고 ▲간사함을 적발하는 능력이 귀신같았습니다. ▲정사에 뛰어나 1639년 간관(諫官:사간원·사헌부 관리)이 되었고 ▲8차에 걸쳐 관찰사를 했는데 ▲어디서나 짐 꾸러미가 늘 쓸쓸했답니다. ▲이불이 무명이거나 거친 명주였답니다 ▲머리에 쓴 게 낡아 임금님 기에도 안쓰러워 단비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주셨답니다. ▲인정 많고 사리 밝은 고산 주민들이 비석을 세웠습니다(김육 지음 신도비).
■역사를 잘 챙기기로는 봉동·삼례·용진·소양·전주에 많이 사는 전주이씨 회안대군 후손입니다.
△2020년 말에 4색 인쇄 360 폐이지 △종보(宗報:2호) 『회안대군:懷安大君:비용 3,300만원)』을 펼쳐냈습니다. △2020년이 대군의 서세 600주년이라 ‘대군 동상을 세우자’는 타성 말에 귀를 기우려 그 앞 단계로 ‘회안대군 유상(遺像:이철규 화)’을 제작해 봉안(奉安)하였습니다.
지금은 민주주의시대 군수·시장·도지사·교육감을 우리 손으로 뽑습니다. 다시 뽑히려면 표가 필요하지요. 유권자 ‘눈치’를 봅니다. 위의 두 사또 이야기 어떻습니까? 고산주민자치회장(남권희)은 회보에 좋은 글을 올리고(?) 남선(南銑) 현감(관찰사) 이불보다도 더 좋아 폭신한 비싼 이불을 덮어주었습니다. 이도 또한 고산 역사가 됩니다.
/ 이승철 = 칼럼니스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 필자 이승철 님의 개인 사정으로 잠정 중단되었던 ‘대문 밖 너른마당’이 연재를 재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