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장애 등으로 인해 말하지 못하는 언어장애가 있는 장애인을 농아인(聾啞人)이라고 한다.
2020년 6월 말 기준, 완주군의 농아인 수는 약 1200여명.
이들의 손과 발이 돼주는 곳이 바로 완주군수어통역센터(센터장 노동현)다.
농아인에게 사회·교육·문화·의료 등 전반에 걸친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만든 사단법인체로, 지난 2009년 3월 17일 개소했다.
지난 20일 ‘제41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센터에 근무하는 강지현(42)·김민숙(41) 수어통역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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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화’와 ‘수어’, 같은 의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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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2016년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되면서 수어가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갖추게 됐죠. 법이 제정돼 수화가 ‘수어’로 바뀌었기 때문에 수화통역사가 아닌 ‘수어통역사’로 칭하는 게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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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일을 시작하게 동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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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2002년 3월, 전북대학교 수화동아리인 ‘손짓사랑회’에 들어가면서 부터에요. 학교 앞에서 공연을 함께 본 친구가 동아리에 들어가 한 번 배워보자고 해서 시작했어요. 처음엔 ‘이걸 어떻게 다 외울까?’걱정이 됐어요. 암기 과목에 자신이 없었거든요.
△김= 초등학교 6학년 때 교회에서 수어로 찬양을 하는 게 정말 예뻐보였어요. 그러다 중학교 무렵인가? TV를 보는데 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연인으로 나오는 드라마를 보면서 문뜩 ‘내 배우자도 청각장애인이 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수어에 관심 갖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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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활동은 어떻게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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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도내 각 대학교에 손짓사랑회 동아리가 전라북도농아인협회와 연계 돼 있는데요. 협회에서 수어를 가르쳐 주시고, 시험도 보고, 손짓사랑회 학생들과 농아인협회에서 주관하는 행사에 참여하면서 청각장애인들을 직접 만나 수어 통역도 하고 다양한 활동을 한 것 같아요.
△김= 교회에서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에 수어로 찬양을 했어요. 그렇게만 접하다가 배우자에 대한 생각은 늘 갖고 있어서 서점에 가 뭔지 모르지만 그림이라도 보려고 수어와 관련된 책을 한두 권씩 사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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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어통역사로서 길을 걷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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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1학년 때는 사람들과 놀고, 어울리는 동아리 활동이 재밌었어요. 2학년 때 대학생 자원봉사자들과 1박2일 캠프를 가서 처음 청각장애인들을 만났는데 그 당시 ‘수어를 모든 사람이 다 할 줄 알면 청각장애인들이 불편함 없이 살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럴려면 ‘나부터 수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돼보자. 내가 이 사람들의 입과 귀가 돼보자’고 결심을 했어요. 그래서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제 과 공부는 안했어요. 수어통역사를 직업으로 선택했으니까요.
△김= 스무 살 무렵에 청주농아인협회로 취업을 나갔어요. 그 곳에 찾아가 수어 기초반에서 열심히 배웠어요. 이전에는 배우는 곳을 몰라 그 때 배우고 1~2년 쉬다가 다시 기초반, 중급반에서 수어 공부를 하게 됐죠. 거기서 5년 정도 지내다가 내려왔어요.
내려온 뒤에 수어를 배우려고 전라북도협회를 찾다가 결국 못 찾고, 에바다교회에서 초급, 중급 수어를 배웠어요. 그 당시 낮에는 서점에서 일하고, 간호사 등 여러 가지 직업을 경험했죠.
솔직히 직업으로서 수어통역사는 생각을 안했어요. 단지 ‘내 배우자가 청각장애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수어를 배웠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2011년도에 사회복지 공부를 하면서 완주군수어통역센터로 실습을 오게 됐고, 2013년도 6월에 입사를 하면서 직업으로서 길을 걸어가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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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지현(좌측)·김민숙 수어통역사가 인터뷰를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모습. |
ⓒ 완주전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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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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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2002년 3월 1일자로 남원센터에 발령이 났는데요. 3월 말경 퇴근 무렵, 갑자기 경찰에서 사고가 났다는 전화를 받았어요. 일단 남원의료원으로 오라는 거에요. 급히 병원으로 갔죠. 가서 얘기를 들어보니 5살짜리 아들을 둔 엄마가 어린이집 차량을 기다리다, 후진하는 트럭에 부딪혔다는 겁니다.
병원 측에서는 아이엄마 상태가 좋지 않아 전북대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해야된다고 말했어요. 그 때 첫 통역사례인데 119차를 처음 타봤어요.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아주머니는 하반신 마비가 왔고, 지금은 목발 짚고 다니는 같아요.
두 번째는 1년차 쯤 됐을 땐데 산부인과 통역을 하고 싶었어요. 저보다 3살 어린 청각장애인 엄마가 둘째를 임신했는데, 제가 “산부인과 다니냐?”고 물으니 “첫째를 낳은 경험이 있어 제 도움 없이 둘째도 충분히 낳을 수 있다”고 대답했어요. 그때 저는 “한 번 믿고, 산부인과 통역을 하게 가보자”고 설득해 결국 아주머니를 데리고 산부인과로 갔어요.
의사는 “통역사가 있는 줄 몰랐다”면서 “왜 이제야 왔느냐?”고 제게 오히려 꾸짖는 거에요. 이유를 묻자 의사는 병원에 올때마다 아이엄마에게 조금밖에 전달하지 못했다는 거에요. 그래도 아이 엄마가 고개를 끄덕이고 해서 그동안 자신과 충분한 대화가 된 줄 알았는데, 제가 와서 수어 통역을 하는 것을 보니 (의사가)그간 답답했던 것이 해소돼 저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 같아요.
어째든 분만실 들어가 출산할 때까지 함께 산부인과에 다녔어요. 다니면서 아이엄마 배를 만지면서 ‘아가야 엄마 고생시키지 말고 잘 나와야 돼’라고 자주 말해줬어요. 무사히 아이를 낳았고, 시간이 지나 유모차를 끌고 만났는데 이름을 부르자 아이가 저를 쳐다보는 거에요. 제 목소리를 기억했나봐요. 그때 놀랐어요. 지금 아마도 고등학교 3학년이 됐을 겁니다.
△김=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아요. 병원통역이 대부분인데요. 한 번은 넷째 임신하신 분이 태중에 있을 때부터 많이 좋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침에 연락이 와 병원에 가야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때 저도 119를 처음 타봤어요.
아이를 낳았는데 아플 때는 제가 운전해서 병원에 데리고 가고 그랬죠. 그 분은 제가 병원에 모시고 가면 항상 “힘들고 바쁠텐데 고맙다”며 제 손을 꼭 잡아 주는데요. 제 일이기 때문에 하는 건데 봉사하는 걸로 아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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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을 흘린 적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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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신입 때는 아이 낳을 때, 사고 났을 때 가리지 않고 많이 울었어요. 제가 2년 동안 남원에 있다 김제로 옮겨 청각장애인선생님과 같이 근무할 때였어요. 아무래도 말은 못하지만 그분은 이용자이기 전에 같은 직원이잖아요.
한 번은 바쁠 때였는데 저에게 “자기 엄마에게 전화 한 번 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겁니다. 사람인지라 짜증도 나지만 전화를 해서 건강을 물어보고, 딸에게 하고 싶은 말, 딸이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대신 전달해줬어요.
통화가 끝나고, 직원인 제게 “고마워요. 근데 우리 엄마 목소리 어때요?” 라고 묻는데 순간 눈물이 울컥 나는 거에요. 사실 저도 23살 때 엄마가 돌아가셔서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데 그 선생님은 청각장애인이라 얼마나 엄마 목소리가 듣고 싶겠어요. 정말 그 때를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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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만두고 싶을 때는 없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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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수어를 배운 동기가 배우자 때문이었는데 정작 배우자는 비장애인을 만났어요. 서점에서 일 할 때 교회 오빠 소개로 만나 27살에 결혼 했는데요.
결혼하고 회사에 다니면서 천식이 생겼어요. 대학생활하면서 배웠으면 좀 나았겠는데 입사하면서 통역일을 하다보니 기본적인 것 밖에 할 줄 몰라 사람을 만나 수어를 하려니 무섭고 떨렸어요. 하면 할수록 어렵고 힘들었죠.
그러다보니 병이 생기고,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보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돼 결국 육아휴직을 신청하고 쉬면서 고민을 해보기로 결심했어요.
신랑은 제가 하는 거에 대해 응원해 주지만 언제든 힘들면 그만두라고 말합니다. 1년 쉬다 복직하고도 힘들면 그만 둬야겠다 마음먹었는데, 막상 복직하니 강지현 부장님이 새로 오고, 분위기도 바뀌었어요. 저랑 잘 맞기도 했고요.
‘이제야 평생직장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어 지금까지 이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힘들 때는 1년에 12kg이 빠졌는데 지금은 건강을 되찾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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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든 점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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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저희는 봉사자가 아니라 수어통역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데, 주위에서 자꾸 “봉사하시네요”, “좋은 일을 하시네요”라는 말을 할 때 기분이 좋지 않아요. 저희는 전문가라고 생각하는데 아직 수어통역사에 대해 직업적으로 인식을 안 하는 것 같아요. 또 “재능기부 해주셔야죠?”라는 식으로 통역을 요청하는 데요. 재능기부는 하는 사람이 결정을 하는 거지, 원하는 사람이 결정하는 게 아니잖아요?
△강= 일본어·영어 통역사는 통역비를 주면서 수어통역사는 봉사로 잘못 알고 계시는 분이 많아요. 그래도 완주군은 타 지자체들과 달리 통역비와 관련해서는 깨어 있더라고요. 한번은 코로나19관련 군수님이 브리핑을 하는데 저희에게 화면 통역을 해달라고 긴박하게 연락이 왔어요. 솔직히 저희는 군청에서 하는 거라 통역비 생각을 안했어요. 그런데 끝나고 나니 군청에서 “애쓰셨어요. 통역비 어떻게 해드릴까요?”라고 물어 깜짝 놀랐어요.
△김= 사실 수어는 단어를 풀어서 해야 하기 때문에 집중력과 순발력이 필요해요. 더 어려운 것은 수어를 바꾸고 있는 도중에 또 다른 말을 하면 계속해서 들으면서 귀로는 듣고, 머리로는 수어로 바꾸고, 손은 움직이고 있고, 그 다음 것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통역을 하고 나면 녹초가 될 정도로 정신적·육체적으로 힘듭니다. 특히나 뉴스는 심합니다.
△강= 저는 어떤 사람들과도 소통하는 김민숙 과장님과 달리 유연함이 없고, 성격이 팍팍해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처음 1년차 때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우연히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DJ가 “무슨 일이든 2년을 해보고 결정하라”고 해서 2년을 버텨보니 계속 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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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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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앞서 말했듯이 ‘전국민이 수화를 할 수 있는 것’이 꿈입니다. 물론 예전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수어에 관심을 갖고 있어요. 1년에 한 번 자격증시험이 있어 많은 수어통역사가 배출되고 있는데 센터일이 힘들기 때문에 대부분 개인 프리랜서로 뜁니다. 사회복지사가 하나의 자격증을 더 갖고 있는 거죠.
△김= 저는 빵을 좋아해요. 그래서 예전부터 신랑이랑 빵집을 하는 게 꿈입니다. 우선 은퇴 전에 제과제빵 자격증을 따고, 이후에는 빵을 만들어 주말에 고아원에 방문해서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함께 놀아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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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장애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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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청각장애인들은 들리지 않는데 관공서 직원들이 자꾸 전화하는데 제발 전화하지 말아주세요. 많은 사람들이 들린다고 생각을 합니다.
말이 들리지 않고 말도 못합니다. 그리고 저희는 전문적인 직업인이지 봉사자가 아닙니다.
또 하나, 청각장애인과 절대 필담으로 소통되지 않습니다. 대부분 “그냥 글 써서 하면 되잖아”라고 하는데 수어는 한국어와 다른 언어입니다.
하나 더 당부 드리자면 청각장애인들이 수화를 못하는 비장애인들을 만나 대화할 때 머리를 끄덕이는 것은 ‘긍정’의 의미가 아니라 ‘100%이해하지 못했으니 그냥 여기서 대화를 빨리 끝내 달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