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수와 그 가수의 목소리부터 창법까지 완벽하게 소화 가능한 ‘모창 도전자’의 노래 대결로 인기리에 방송된 JTBC 프로그램 ‘히든싱어’. 입담 좋은 아나운서 전현무씨의 사회로 시즌6까지 방송될 정도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 프로그램에 완주 출신이 당당히 우승을 차지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 같다.
주인공은 바로 삼례가 고향인 가수 김완준(48)씨다.
그는 히든싱어 시즌6에 출연, ‘대한민국 트로트 메들리 4대 천왕’이라 불리는 가수 진성씨를 꺾으면서 파란을 일으켰다.
이후 유튜브 채널 푸하하tv ‘심야신당’에 출연, 170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김완준이라는 이름 석자를 전국에 각인시켰다.
최근에는 ‘세월꽃’이라는 앨범을 발표, 라디오 등 방송매체섭외가 잇따르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과를 소화하고 있다.
지난 달 28일 그가 운영하는 전주 인후동 가게(돌고래 난타 라이브)에서 인터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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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 꿈, 운전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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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준씨의 고향은 삼례읍 해전리 장현마을이다. 김수철(84)·임공이(75)부부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 꿈은 운전기사였다. 당시 먼지 풀풀 날리며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검정색 지프차량에 매료돼 멋진 운전기사를 꿈꿨단다.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그가 한 살 때 부친은 사우디로 돈 벌러 나갔고, 어머니 홀로 자식들을 뒷바라지하느라 고생 많았다. 4학년 무렵, 부친이 귀국했고, 그때서야 처음 아버지 얼굴을 봤다고.
“아버지 얼굴을 모르고 컸어요. 언젠가 부터 해외에서 우편이 날아 왔는데 어머니가 읽어주고 하다 보니 아버지가 계신지 알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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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 보다는 음악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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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포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리남중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1학년 어느 날, 우연히 TV를 시청하다 전영록씨가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고 ‘불티’라는 곡을 부르는 모습에 반했다.
그때 이후부터 학교 갈 때나 집에 돌아올 때 항상 노래를 흥얼거렸고, ‘스무 살 넘으면 음악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공부보다는 음악에 푹 빠져 돈이 생기는 대로 테이프를 사서 듣고,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즉시 녹음하는 것이 취미가 됐다.
뿐만 아니다. 통기타를 구입해서 독학으로 배우기도 했다. 이렇듯 공부는 뒷전이고 노래에 취해있는 그의 모습을 매일 곁에서 지켜보는 부모님의 한숨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어린 마음에 ‘음악을 그냥 하면 되겠지’라는 생각만 하다 음악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걸 스무 살이 돼서야 깨닫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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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노래자랑 은상 수상, 하지만 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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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경연대회에 나가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드디어 스물한 살 때, 기회가 찾아왔다. 전주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전국노래자랑에 김원준씨의 ‘모두 잠든 후에’라는 곡을 불러 우수상을 차지했다.
심사위원이었던 작곡가 임종수 선생으로부터 “너 노래 참 잘한다. 나 한테 찾아와”라는 극찬도 받았다.
“기분이 정말 좋았죠. 학교 다닐 때부터 꿨던 가수의 꿈을 이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가수가 되기 위해 앨범을 내야하는데 주머니는 텅텅 비어 있었다.
그렇다고 부모님에게 손을 벌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앨범은 고사하고 가수하겠다는 말을 꺼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히 알기 때문이었다. 하는 수 없이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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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의 길, 고난의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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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했다. 오로지 앨범 한 장 내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땀흘리다보니 돈도 제법 모았다.
하지만 무리한 탓에 허리를 다치는 등 몸이 망가졌다. 다행히 치료를 받아 회복됐다. 문제는 이일로 인해 부모님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
“난리 났죠. ‘아빠, 엄마가 내가 뭘 못해 주겠냐? 왜 힘든 일을 하려고 하냐?’며 앨범 내고 가수가 되는 것을 포기하라고 했어요.”
그 뒤로 가수의 꿈은 잠시 접어두고, 건강식품 회사에 들어갔다. 전국으로 다니며 사람들을 많이 모아 놓고 의료기나 건강관련 제품을 판매하는데,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를 띄우는 일을 했다.
적성에 딱 맞았다. ‘노래를 잘 한다’, ‘너, 가수 해야겠다’ 등 사람들의 칭찬에 자신감이 생겼다.
또 다른 일에 도전하고 싶어 회사를 그만두고, 서울에서 옷 장사를 했다가 3년 만에 두 손 들었다. 가수의 꿈은 점점 멀어지고 이제는 먹고 사는 문제를 고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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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리지 못한 가수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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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후반에 군산 GM대우에 입사했다. 7년 동안 근무했다. 매사 꼼꼼히 일처리를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회사에서 48명을 관리해야하는 반장 자리를 내줬다. 아무런 걱정 없이 일했다. 하지만 늘 허전했고, 가슴 한 구석에서는 버리지 못한 가수의 꿈이 스멀스멀 되어 올라왔다.
“늦었지만 내가 벌어놓은 돈에다 퇴직금을 보태 앨범을 내고, 한 번 멋있게 날개를 달아보자고 마음을 굳게 다졌어요.”
그렇게 다짐을 하고, 7년 동안의 회사생활을 정리했다. 사실 그는 회사에 다니면서 락밴드 활동을 했다. 무려 3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직장인 밴드 보컬을 맡아 전주대와 전북대 동아리들과 함께 공연을 많이 했다.
주야 2교대로 몸은 힘들고 피곤했지만 워낙 음악을 좋아하다보니 밴드생활은 그의 삶에 있어 윤활유가 됐다. 그러니 회사를 정리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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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달 가요제, 첫 번째 터닝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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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나와 다시 가수가 되기 위해 ‘트로트 사관학교’라 불리는 ‘박달 가요제’에 참가, 진시몬에 ‘애수’라는 곡으로 은상을 받았고 상금 400만원도 챙겼다. 금잔디, 지원이 등 유명한 가수들이 이 가요제 출신들이란다. 왜 트로트 사관학교라는 수식어가 붙는지 알 수 있다.
어째든 큰 대회에서 은상을 받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이 거대한 사건으로 인해 부모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 기뻤다.
“어머니가 ‘너 가수할래?’라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네. 가수해야 할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어요.”
흔쾌히 부모님으로부터 인정받고 당당하게 가수의 길을 걷게 됐다. 우선 퇴직금과 그간 모은 돈에다 부친이 앨범을 내는데 보태 쓰라며 400만원을 건네줬다.
이 돈으로 2008년도에 1집 싱글앨범 ‘임자 있는 여자’를 냈다. 역사적인 첫 앨범이었다. “꿈만 같았죠. 앨범 한 장 들고 보는데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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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님은 든든한 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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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들의 조언을 얻어 앨범을 들고 열심히 방송국을 돌아다녔지만 가수로 성공하기란 쉽지 않았다.
담당 PD만나는 것은 접어두고라도, 방송국 경비실에서 거절당하며 높은 벽을 실감했다. 주변 지인들도 ‘뭐 하러 앨범내고 가수하냐? 직장이나 다니지’라며 쓴 소리를 내뱉었다.
덩달아 기운도 빠졌다. “달랑 CD한 장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는데, 돈도 안되고, 수입도 없고, 너무 외로운 거예요. ‘내가 왜 이러고 다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더욱 힘들 게 한 것은 선후배 가수 간 생존 경쟁에서 얻는 상처였다. 그래서 한동안 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것도 잠시, 노래를 안 하면 병이 날 것 같았다. 그가 이름이 알려져 인터뷰를 할 때마다 ‘김완준씨에게 노래란 무엇인가요?’라고 물어보면 ‘산소호흡기’라고 대답할 만큼 노래는 그에게 없어서는 절대 안 된다.
무엇보다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의 힘이 컸다. 특히 “이왕 한 것, 끝을 봐야지”라며 크게 응원해준 부모님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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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든싱어 출연, 진성을 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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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가수 진성씨와 평소 잘 알고 지냈다.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며 무명생활을 함께했는데, 실례로 지역 공연에서 진성씨가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러야하는데 반주음악(MR)이 없어 당황했던 일 등 에피소드가 많다.
어느 날, ‘히든싱어’를 시청하다 가수 진성편이 방송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지체 없이 ‘모창가수’에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먼저 ‘님의 등불’과 ‘태클을 걸지마’ 등 2곡을 방송국으로 보냈고, 작가로부터 ‘올라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후 600명, 300명, 60명, 14명으로 후보자를 가려냈고, 무려 3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 5인에 선발됐다. 그리고 본 방송에서 진성씨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며, 최초로 트로트 가수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기록도 남겼다.
“믿기지 않았고, 사실 기대하지 않았어요. 진성형님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는데, 우승을 하니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미안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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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려놓을 때 얻은 선물 ‘세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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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싱어를 통해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느꼈고, 자신을 내려놓는 방법 등 많은 것을 배웠단다.
“준비하면서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가족들을 위해서 참고 견뎌냈습니다. 이겨내니 좋은 결과를 얻게 됐어요. 이제는 내가 가족들에게 보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죠.”
히든싱어 우승 이후 방송에 출연하고,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올 것이라는 기대는 코로나19로 인해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방송을 통해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면서 응원해주는 팬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또 히든싱어에서 우승한 뒤 우는 모습을 본 송광호 작곡가가 ‘도와주겠다’며 ‘세월꽃’이라는 귀한 곡을 선물했다.
현재 세월꽃은 올해 7월 발매 된 이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뿐만 아니다. 유튜브 채널 푸하하tv ‘심야신당’에도 출연했는데, 170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고, 라디오 등 여러 매체에서 섭외 요청도 잇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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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꾸준히 사랑받는 가수 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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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그는 스케줄 외에 전주시 인후동,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돌고래난타라이브)에서 개인 유튜브 방송을 하며, 팬들과 소통한다. 또 후배 가수들에게 2시간짜리 미니콘서트 방송을 만들어준다.
“누가 넘어지면 일으켜 주고, 후배들한테 귀감이 되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사람 냄새나는 가수, 반짝하지 않고 대중들로부터 꾸준히 사랑받는 가수가 되고 싶다는 김완준씨.
이름에서 ‘ㄴ’받침 하나만 빼면 고향인 완주군과 비슷하다. 그래서 일까? 올 봄에 완주군 지역을 홍보하고 싶다며 작곡가로부터 연락이 와 ‘봉동아! 생강아!’라는 곡을 녹음했단다.
“고향에서 저를 불러주면 언제든 달려가야죠.” 앞으로 ‘세월꽃’을 시작으로 대중들이 편하게 따라 부를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김완준의 색깔이 담긴 곡들을 많이 부르겠다는 계획이다.
히트곡보다 ‘가족’이 1번이라는 그의 따뜻한 마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길 간절히 기도하며 인터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