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뭘까요?…나이가 드니까 나 자신과 내 소유를 위해 살았던 것은 다 없어집니다…(중략) 남을 위해 살았던 것만이 보람으로 남습니다. 열심히 사십시오, 즐겁게 사십시오, 베풀고 봉사하며 사십시오, 사랑하며 넓은 마음을 가지고 사십시오.”
올해 나이 106세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최고령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속삭임’ 中 일부다. 이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며, 자기 성찰과 함께 삶의 교훈을 주고 있다.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 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버거운 현실을 마주하고, 살면서 실천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래도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그의 말처럼 ‘나 보다 남을 위해’, 그리고 ‘베풀고, 봉사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며 세상을 더욱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드는 사람들 말이다.
오늘 소개할 인물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바로 완주 출신의 유인수 어르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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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주전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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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완주군으로부터 ‘장학금 기탁’ 관련, 보도 자료를 받았다. “유인수 이서혁신 파크골프 클럽 고문이 완주군인재육성재단에 장학금 500만 원을 기탁했다”는 내용이었다.
“올해 뿐 아니라 지난해에도 완주군에 500만원을 기부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적지 않은 금액을 선뜻 기부한 이유와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듣고 싶어 담당 공무원의 도움을 받아 어르신을 만났다.
유인수 어르신의 올해 나이는 79세다. 백발이긴 하지만 팔순을 앞둔 나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몸은 40대의 건장한 청년같이 단단해 보였다. 반면 얼굴은 온화해 보였고, 웃는 표정에서 여유도 느껴졌다.
어르신의 고향은 삼례읍 구와리. 지금은 전북 혁신도시의 한 아파트에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유장옥·서순이 부부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삼례초와 봉동초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전주 유씨 대종중 이사장을 오래 지냈고, 전주 유씨 문중에서 설립한 전주 유일여자고등학교의 학교법인 시사학원의 부이사장도 역임했다.
특히 완주군을 빛낸 인물로 선정돼 영예의 ‘완주군민의장 수상자’라는 타이틀도 갖고 있고 있다.
어머니는 전 전북일보 회장을 지낸 故서정상 박사와 같은 집안으로, 전주시 호성동이 고향이다.
# 유인수 어르신은 삼례동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전주로 이사했다. 구와리에 살 때만 해도 조부가 동네에서 손꼽을 정도로 농토가 많아 넉넉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부친이 교사를 그만두고, 건축업에 뛰어 들어 들면서 가세가 기울어졌다.
“아버지가 전주공고 건축과 출신이라 지인이 자꾸 사업을 하자고 해서 결국 교편을 내려놓고 서울로 올라가 건축업을 시작하게 됐는데 잘못됐어요.”
서울의 모 대학 신축공사를 맡았는데, 원청회사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인부들에게 줄 돈을 마련하느라 구와리 땅을 팔게 돼 재산을 많이 잃었다.
건설업 부도로 부친은 고향으로 내려와 ‘유일 양봉원’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양봉업을 시작했다.
“지금은 별로 양봉하는 사람이 없는데, 그 당시만 해도 구와리에 양봉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 그 무렵, 유인수 어르신은 서울로 올라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 사회학과에 입학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1학년 때 중도 포기하고 다시 고향에 내려와 부친의 양봉일을 도왔다.
“건강이 좋지 않은 아버지 대신 벌을 가지고 제주도에 들어가 몇 달씩 있다가 유채꽃이 지면 육지로 올라와 목포, 신안, 함평쪽으로 이동한 다음, 유채 꿀을 땄어요. 품질은 좋았지만 판로가 어려웠죠.”
종업원 2명과 함께 천막생활을 하며 꿀을 따러 전국을 누볐다. 심지어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된 휴전선 지역에 들어가 벌통을 놓고, 아카시아 꿀을 채취하기도 했다.
“한 번 들어가면 보통 3주 정도 있다가 끝나면 전북으로 내려와 고산 대아리 밤나무 지역에 가서 놓고 그렇게 벌 이동 양봉을 꾸준히 했어요.”
그렇게 꿀을 따기 위해 제주도에서 임진강까지 비포장 자갈밭길을 달렸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덕분에 그 당시 대한민국 양봉업계를 주무르다시피 했다. 실제 삼례 양봉업자들이 주축이 돼 대한민국양봉협회가 설립됐고, 몇 년이 채 안 돼 한국양봉협동조합도 만들었다.
타 지역의 경우 전국으로 분산돼 시군에 고작 손가락으로 셀만큼 적었지만, 삼례읍 구와리 지역에는 양봉업이 집단화를 이룰 정도로 많았고, 단합 역시 잘 됐단다.
하지만 여전히 생산량에 비해 판매가 원활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낮아 꿀은 인삼과 함께 부유층만에서만 한정적으로 소비됐기 때문이다.
이후 1980년대에 경제성장과 함께 생활수준이 좋아지면서 양봉 꿀은 호황기를 맞게 됐다. 9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지만, 우후죽순 각종 건강식품이 쏟아지면서 점차 양봉업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 그는 양봉 꿀의 침체기를 미리 예측하고, 90년 대 초, 대산식품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전국에 9개 대리점을 낸 뒤, 벌꿀을 비롯 로얄제리, 프로폴리스 등을 주력상품으로 다양한 건강식품 판매했다.
“그때는 농협 상표가 신임도가 높아 지역 농협과 체인을 맺다보니, 물건도 많이 판매돼 돈도 제법 많이 벌었어요.”
하지만 대기업이 뛰어 드는 등 빠르게 변화하는 건강식품 시장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대리점이 문을 닫게 되면서 2005년도에 사업을 완전 정리했다.
다행히도 그동안 열심히 땀 흘려 번 돈으로 건물 두 채를 장만해 생활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 사업을 하면서 지역 사회 봉사활동에도 많이 참여했다. 1980년도에 세계 구급의 봉사단체인 국제라이온스협회에 입회해 전주풍남라이온스클럽에서 28년 동안 활동하면서 전북지구 부총재까지 지냈다.
또한 청춘을 바쳐 일해서 값지게 얻은 한국양봉협회 완주군 초대회장이란 직함으로 4년 간 봉사했다. 아울러 전주 유일여고 학교 법인 이사로 4년간 일했고, 완주경찰서 행정발전위원회에서 10년 동안 활동하며, 위원장을 2년간 맡았다.
틈틈이 공부해 사회복지사와 건강가정사, 노인심리상담사, 치매예방지도사 등 여러 자격증을 획득, 경로당이나 노인복지시설을 다니며 건강 전도사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봉사활동뿐 아니라 스포츠에도 관심이 많다. 먼저, 정규 골프는 구력이 28년으로 싱글패와 이글패가 많이 받았고, 파크골프는 16년 정도 되는데, 완주군수배 1위와 3위를 각각 기록할 만큼 빼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다.
완주군파크골프연합회 부회장은 거저 얻어진 게 아니다. 볼링도 국대급 실력을 자랑한다. 구력만 자그마치 55년이다.
아시아시니어볼링대회에 국가대표 선수로 참가했고, 한국시니어볼링연맹 이사로도 오랜 시간 활동했다.
사실 10년 전 이서혁신도시로 이사 오기 전 풍남동에 살 때부터 꾸준히 헬스장을 다니며 운동했던 게 현재까지 건강을 유지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
그 덕분에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헬스장에서 10년 넘게 봉사를 하며, 주민들에게 여러 유익을 주고 있다.
“헬스장 관리원을 두면 연간 3천만 원 이상 지출이 되는데 제가 선거관리위원장 맡으면서 헬스장에 뜻이 있는 7명을 자원봉사자로 모집해 지금까지 기구 고장 나면 손도 봐주고, 계절에 맞게 온도도 맞춰주는 일을 하고 있어요.”
헬스장 봉사회장을 10년 동안 맡아 활동했으니 아파트 지출을 3억 원 정도 줄여준 셈이다.
“돈 내는 봉사도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재능을 남을 위해 사용하는 것도 봉사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내내 육체와 정신이 건강하다는 것을 느꼈다.
# 유인수 어르신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가칭 유일장학복지재단’ 설립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아내와 자녀들도 흔쾌히 동의해 현재 정관까지 만들어놨단다. 법인 인가 등을 거쳐 올 가을 정도 개소식을 열 계획이다.
“재단이 설립되면 유일여고 학생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겠지만, 고향이 완주다 보니 고향 청소년과 학생들에게도 혜택을 많이 주고 싶어요. 라이온스 활동 할 때도 그렇게 했고요.”
완주군인재육성재단에 1천 만 원이라는 큰돈을 기부하게 된 이유를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애향심이 그의 가슴 한 곳에 깊이 자리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가 완주인이라 자랑스럽다. 최근 그에게 ‘인후신협 문화체육위원장’이라는 직함 하나가 더 생겼다. 어느 곳에 있든지 많은 사람들에게 빛이 되어 주는 유인수 인후신협 문화체육위원장의 앞으로의 활약을 응원하며, 그의 좌우명을 끝으로 인터뷰를 마무리 한다.
“진실은 통합니다. 아무리 언변이 좋아도 진실이 아닌 것은 언젠가 들통이 나게 마련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