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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철 = 칼럼니스트 |
ⓒ 완주전주신문 |
고산면 상삼기 강세형을 따라 안양 그의 외숙 댁과, 구영서와 동행 광화문 아무개 천막집, 구연식 선생 부평 군부대를 찾아가 밥 얻어먹고 잠잔 적이 있으며, 친구 김기용 군이 남산동 누나 댁에 왔다기에 만나 쇠고기 찌개 밥상을 받은 일이 있네요.
소사(지금 부천) 이모 댁에서 오랫동안 먹고 잔 기간이 생각납니다. 목포 친구 박승천과 익산 처녀 김순주가 연애하여 혼례 전 신혼살림을 차렸는데 거기 들려 잔 적이 있네요.
누군가가 전라선 막차로 온다기에 서울역에 나가 기다려도 오질 않아 신당동 자취방에 돌아오던 중 12시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려 어쩔 수가 없어 어느 음식점에 들려 잠 좀 재워 달라고 사정 하니 식탁을 붙여 잠자리를 마련해 줬는데 모기가 하도 많아 4시 해제 사이렌에 맞춰 인사도 없이 나왔습니다. 삼천동 이존화 의원 국회관사에서 밥 얻어먹은 날이 있네요.
1954년 2월 장총동 구영철 자취방에서 여러 날을 지냈습니다. 전주상고생 구준서 하숙집에 가 신세 진 일도 있습니다. 다른 설명 필요 없고 오직 ‘고맙습니다.’ 이말 한 마디 뿐입니다. 누가 “혹 눈칫밥 없었더냐?” 묻는다면 배은망덕(背恩忘德)이 될까 봐 ‘눈칫밥’ 이 말 자체를 싫어합니다.
홍봉진 교수와 사모님이 학자금을 주셔서 저 노년이 편합니다. 비봉면 수선리 평지마을 박태근 옹은 소년시절 초등학교 동창생 집에서 며칠 동안 자고 먹은 빚(고마움)으로 그 손자에게 장학금 1천만 원을 줬습니다. 그런데 전 막국수 한 그릇 제대로 사지 못하고 머리가 허연 합니다.
어찌 이뿐이리오. 어머니 상사에 부조금, 4남매 자녀 혼인 때 받은 축하금 잊을 수가 없는데 세월은 가고 만나기조차 어렵네요. 이학순 선생님과는 1980년대 한 학교 근무가 그 인연 전부인데 2021년 노병 중이라니 선물을 사들고 오셨습니다. 40년 전 이름을 잊지 않고 문병 오신 선심은 천사입니다.
1960년 1월 3일 혼인하고 5일 재행(再行)의 날 장모, 처남의 댁(3인), 두 처형이 새신랑 저녁상을 차렸는데 생애 최고의 밥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상 차린 6인 중 한 분 남았네요.
1968년 이른 봄 운주면 금당리 용계원 조은철(조만곤 조카) 집 점심 고봉밥 잊을 수 없습니다. 같은 해 손영조 어르신 댁의 점심상은 한국 인심을 대변하는 양반의 초청이었습니다. 부인과 손을정 따님의 정성이 넘쳐났습니다. 1969년 말 손을정 양이 제집을 방문한 이후 이제까지 감감 소식이네요.
지난 세월 54년…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만나지 마라는…’ 세상 철칙이 있네요. 다들 늙어 아니 만남이 더 아름답답니다.
돌아다니는 버릇이 코로나19로 묶기고, 노쇠로 억압 받으며, 가야 반겨줄 이 없어 방에 콕 박혀 지냅니다. 뛰는 사람 부럽습니다. 오늘(2월 15일)이 정월대보름 ‘울 넘어 산을 넘어, 길 따라 강을 따라 나서고 싶습니다.’
/ 이승철 = 칼럼니스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