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대문 밖 너른 마당(347회-통합 752회) : 아버님!… 방성대곡(放聲大哭)

admin 기자 입력 2021.12.24 09:22 수정 2021.12.24 09:22

아버님!… 방성대곡(放聲大哭)

↑↑ 이승철 = 칼럼니스트
ⓒ 완주전주신문
“아버님! 흑산도 홍어회와 찜·탕 드세요”, “밥은 경기도 산 쌀밥입니다.”, “강화도 새우젓, 광천 조기젓, 곰소 가리비젓, 영광보리굴비 잡수세요.”, “이건 고산 한우 암소 갈비입니다.”, “이 술은 양주 독합니다. 맥주 소주 남원 이백막걸리 골라 드세요.”, “드시다 쉬시고, 쉬시다 드세요”, “수박, 참외, 딸기입니다. 외국 과일도 있습니다.”, “여기는 찬물 여기는 더운물 틀기만 하면 됩니다.”, “주무실 때 침대에 누우세요. 바닥은 푹신 이불은 가볍고 따뜻합니다.”, “내일은 자가용으로 나들이를 하시는데 염소탕, 쇠머리국밥, 쇠고기 비빔밥, 화산약수가든 붕어찜… 골라만 주세요.”

우리 아버님은 이런 소리 한 번 듣지 못하고 마흔 아홉에 가셨습니다. 고종 때 태어나 통감정치, 총독정치, 세계 2차 대전을 겪다가 마흔 살에 해방을 맞아 미국군정 반토막 남한 독립, 곧 6.25 전쟁… 먹고 싶어도 먹을 게 없고 입고 싶어도 입을 것이 없었습니다. 배고픈 걸 잘 알기에 식구들 밥걱정 놓아 본 적 없이 밤낮 돌아다녔습니다.

유상몰수-유상분배 소작 논을 받는 토지분배가 있었고, 수득세·상환곡을 현물로 내야 했습니다. 농사가 시원치 않아 소출이 적어 내지 못하면 경찰관 지서에서 잡아갔습니다.

전쟁 중 가난뱅이는 동상면이나 운주면에 들어가 남의 산 나무를 베어 숯을 굽거나 장작을 만들어 팔아먹고 살았습니다. 우리 형제도 갔습니다. 식전에 한 포라도 더 만들어야겠다며 나간 동생은 빗나간 도끼날에 왼쪽 새끼발가락이 도막났지요. 병석의 아버지가 빈 지게로 들어서는 형제를 바라보시던 그 시선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53년 7월 휴전이 되었고 이듬해 9월 흐린 날 마을 사람들이 구두골 반평지 산자락에 묻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병으로(간암? 위암?) 가신지도 모릅니다.

저 10대 20대 두려움 속에서 예고(豫告) 가출을 했습니다. 일곱 식구 먹고 살기 위해 월급쟁이를 하며 깩 소리 한 번 못하고 견뎌냈습니다. 기회 이용에 무능한 바보였지요.

지금 대통령 후보 나이가 아버님 손자들과 비슷합니다. 경력만 다를 뿐 학력은 비슷합니다. 저 혹 죽으면 조문 올 국회의원-도의원-시·군의원이 있습니다.

빚 얻기가 어려웠고 제 때 갚지 못하면 ‘빚진 죄인’이었습니다. 다급하면 ‘장에 가서 보자’ 돈 나올 구멍도 없는 데 막연했던 약속 멱살을 잡히고 뺨을 맞아도 당할 수밖에 없었던 만천하 아버지들 여러분! 부엌에서 “어머니! 제 밥 좀 고봉으로 펴요.”

아들은 좋아 한참 먹다보니 밑바닥에서 행주가 나왔습니다. 어머니도 아들도 울었습니다. 들은 이야기 그 모습을 머리에서 지우지를 못하고 평생 밥 한 끼의 소중함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방성대곡 땅을 치며 울고 싶으나 늙어 목소리가 나오질 않습니다. 울고 싶은 분들 나오세요. 함께 울어나 볼까요?


/ 이승철 = 칼럼니스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저작권자 완주전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