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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끊임없는 도전, 배움의 즐거움 때문이죠”

원제연 기자 입력 2021.08.27 10:42 수정 2021.08.27 10:42

(특집 / 귀농 3년차 김영두 박사)

사람들은 누구나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어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말기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호스피스 전문의 오츠 슈이치는 ‘죽을 때 후회하지 않는 사람들의 습관 : 마지막 순간까지 행복하라’라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할 것’과 ‘집착하지 말 것’,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후회하지 않는 사람들의 습관을 실천해온 사람이 완주군에 살고 있다. 바로 동상면 신월리 용연마을 주민 김영두(64)씨다.



■ 동상 신월리에서 인생 2막 열어

검게 그을린 얼굴에 까무잡잡한 피부, 사투리 섞인 말투가 옆집 형님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김영두씨의 귀농 전 직업은 농업박사다. 지난 2018년 6월, 농촌진흥청 소속기관인 국립식량과학원 연구관을 끝으로 35년간의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3년 전 동상면 신월리 용연마을에 터를 잡았다.

사실 이곳으로 이사 온 이유는 오래 전부터 전원생활을 꿈꿔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학교 다닐 때 며칠 머무르면서 느꼈던 맑은 공기, 주변 환경과 마을 주민 등의 행복한 추억도 한몫했다.

“퇴직하기 몇 해 전에 진안에 살고 싶어 돌아다니다가 결국 포기하고, 내려오다 화심순두부집에 들러 국밥 한 그릇을 먹는데 갑자기 이 마을이 생각났어요.”

200평 남짓 땅을 사 집을 짓고, 작은 텃밭에 고추, 들깨, 호박, 가지 등 18가지의 다양한 농작물을 심었다.

지금이야 동네 주민들이 ‘김 박사님’이라고 부르며, 반갑고, 편안하게 맞이해 주지만, 처음 이사와 집 지을 당시에는 쉽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다.

“대문을 잠갔는데 주민이 와서 ‘이 마을은 40년 동안 대문을 잠근 집 없었다’고 해서 계속 열어놓고 살아요. 아무래도 외부에서 들어오니 경계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뿐만 아니다. ‘도시에서 살던 사람이 농사나 지을 수 있을까?’ 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던 주민들은 6개월 쯤 지나서야 숙련된 농법을 보고 난 뒤, ‘농약살포 시기 등을 물어보며, 한걸음씩 그에게 다가왔다.

“농촌진흥청에 근무했다는 것을 비밀로 했어요. 굳이 말할 필요 없고요. 농사를 잘 짓다보니 나중에는 직업이 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는 작물재배 기술 등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추석이나 설날에는 잊지 않고, 주민들에게 선물을 하고, 소통하면서 용연마을 주민으로 인정 받았다.



■ 못말리는 배움의 즐거움

그는 많은 재주를 갖고 있다. 한국화, 캘리그라피, 도자기, 테라코타, 조각은 이미 전문가 수준이고, 문예사조에 등단할 정도로 빼어난 글 솜씨에다 기타, 드럼, 오카리나, 봉고 등 악기연주는 물론 바빠서 자격증만 따지 않았을 뿐 웬만한 한식요리를 척척 해낼 만큼 음식솜씨도 알아준다.

또 종류별 다양한 막걸리를 직접 만들고, 탁구 실력도 선수 못지않다. 최근에는 철학에도 관심이 많아 공부를 새로 시작했다.

이렇듯 그는 계속해서 끊임없이 도전하고 이뤄낸다.

이유를 물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배움의 즐거움 때문이란다.

“어설프지만 집 처마도 혼자 만들었어요. 아들이 아직 장가를 안 갔지만 손주 태워줄 그네도 만들었고요. 내가 해냈다는 희열과 만족감이 자신감을 갖게 합니다.”

사실 그의 어릴 적 성격은 내성적이었다. 변화된 계기가 있었다.

누나 결혼식 때 바지에 구멍이 나 사진을 찍는데 부끄럽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이때 먼 친척이 옆으로 다가와 ‘손으로 가려라’고 말해 그대로 따라했더니 고민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것.

그때부터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이후 어떤 일이든 그런 생각을 갖다 보니 거의 안되는 일이 없었단다.
ⓒ 완주전주신문



■ 농대 입학, 꿈의 첫 걸음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살았던 그는 농업 분야 최고 전문가인 ‘박사’ 직함을 얻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도 보통 사람들과 달랐다.

전주 팔복동에서 칠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팔복초 시절, 남의 집에 가면 책을 가장 먼저 찾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특히 책장에 300권이 넘는 책이 있는 선생님의 집은 그에게 천국과도 같았다.

하루에 책을 30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데에는 그 당시 독서 습관이 큰 영향을 줬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신흥고로 입학했다. 고등학교 때에는 공부보다는 저녁을 굶으면서 인근 다가공원을 거닐며, 소설을 읽고, 시 쓰는 데 푹 빠졌다.

대학 입학 무렵, 10등 안에 들 정도로 공부를 제법 잘 했던 친구가 전북대 농대를 제안했다.
“돈도 안 들고, 장학금 받고, 농업이 좋고, 촌에 사니까 함께 열심히 해보자는 겁니다. 친구는 충분히 서울대 등 좋은 대학 들어갈 성적인데요.”

결과는 재밌다. “친구가 농대 원서를 대신 써줬는데, 정작 그 친구는 학교에서 반대해 못쓰고, 사대에 갔더라고요.”

그렇게 대학에 들어갔다. 입학 때부터 공부는 뒷전이고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데모했다. 정신이 번쩍들어 3학년 말부터 열심히 공부했다.

노력 끝에 대학원 시험에서 공대, 의대, 농대 모두 합쳐 딱 혼자 합격했다.

학과장은 대학원생 모이는 자리에 데리고 다니며 “공부 안하고 데모만 했던 녀석이 갑자기 변해서 공부를 하는데 엄청 잘한다”며 “김영두를 닮으라”고 말했단다.



■ 아내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공부를 하게 된 이유가 따로 있었다. 바로 아내 박숙(61)씨를 빨리 만나기 위해서였다. 1학년 말에 만났는데, 순탄치 않았단다.

장인이 초등학교 교장에다 집안이 거의 다 약사, 의사일 정도니 농대생인 그와의 교제를 허락할 리 만무했다.

하지만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 아내를 얻기 위해 장인과 내기를 제안하고, 끝까지 반대하자, 담을 넘어가는 바람에 도둑으로 몰려 파출소에 잡혀가기도 했다.

“장인어른에게 ‘내가 마음에 안 들면 마음에 들게 하겠다’고 했어요. 교수가 되라면 될 것이고, 무엇이든 하겠다고요. 나를 택할 수 있는 것을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하면 된다’를 늘 마음속으로 주문했던 그는 마침내 결혼 승낙을 받았고, 스물 일곱 살에 결혼에 골인했다.



■ 아침형 인간이 된 이유

그는 남들과 다른 생활 패턴이 있다. 직장생활을 할 때부터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고 있는데, 일종의 루틴이다. 실제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무조건 잠을 안잔다. 4시부터는 졸리면 자다가 5시 30분부터 7시까지 배드민턴 등 운동을 한다. 그리고 아침을 먹고 출근한다. 일을 마치고, TV를 시청하다 피곤하면 잔다.

신기하게도 2시 22분에는 정확히 일어난다. 퇴근 후 술을 마셔도 똑 같다. 스스로를 ‘아침형 인간’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2002년부터 자신에게 맞는 시간표를 짜서 계속 실천해왔다.

효과는 컸다. “새벽에는 조용하고, 누가 터치할 사람이 없으니 오직 나만의 시간이잖아요. 또 머리는 맑아 공부도 잘 되다보니 연구관 시험 1등 했어요.”

술 먹었다고 다음날 일에 지장을 주고, 머리가 아프다고 점심때 해장하는 보통의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술만 먹었을 뿐이지 나머지 시간은 계속 돌고 있고, 변함없이 자신의 시간표에 맞춰 생활한다는 것이다.

“만일 한국화 4군자를 그린다면 2시에 일어나 3일 동안 난을 계속 치고, 어느 정도 되면 대나무를 3일간 친 다음 아파트 벽에 걸어놓은 뒤 아내에게 잘된 작품을 선택하면 더 이상 안 그립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죠.”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기에 시인으로 등단으로 할 수 있었고, 한국화, 음악, 도자기, 테라코타 등 다양한 분야에 도전 뒤 성취의 기쁨도 맛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깊게 빠지는 것을 철저히 경계한다. 배움의 즐거움을 느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 후회없이 사는 삶이 목표

3년 전부터 동상생활문화센터에서 수강생들에게 캘리그라피와 기타를 가르치고 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재능을 주민들과 공유하고 싶어서였다. 캘러그리피와 기타뿐 아니라 집 안 곳곳에서 그가 투자한 시간에서 얻은 값진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집 뒤에는 아찔한 위험을 감수하고 어렵게 만든 작업실이 있는데, 본래 그의 호를 따 ‘추산’으로 지었다가, 술을 잘 마시는 모습을 보고 시인들이 ‘취산갤러리’라 이름 붙였단다. 이곳에서도 그의 많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현재 그는 동상생활문화센터장의 간곡한 권유로 문화이장을 맡고 있다. 작년 3월에 20미터 넓이의 마을 담장에 주인의 허락을 받아 벽화를 그렸다.

마을이 훤해졌다며 마을 주민들이 좋아했다. 이에 더해 동상면 마을에 신화들을 스토리테링해 소중한 관광자원으로 만들고 싶은 게 김영두 문화이장의 계획이다.

직장인의 첫 걸음을 내딛은 호남농업연구소, 영남농업연구소, 농촌진흥청 등 35년간의 공직 생활과 전원생활까지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지면이 턱 없이 모자라 급히 마무리 하는 게 너무 아쉽다.

서운함을 뒤로 하고, 김영두 박사의 하고 싶은 이야기로 두 시간의 데이트를 마친다.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 두 아들에게는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즐겁게 살라고 전해주고 싶어요. 무엇보다 죽을 때 ‘참! 잘살았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앞으로 나 역시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후회 없이,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미안함 없이, 사는 것이 제 목표인데,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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