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면 삼기리에 사는 손현배(70)씨. 현재 완주국악협회장이다. 완주군농악단장도 맡고 있다. 외모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평범하고, 푸근하다.
하지만 양악과 국악을 섭렵했을 정도로 그의 지나온 삶은 화려하다.
한때 기타를 가르치는 강사를 하고, 미군 부대에서 밴드로도 활약했다.
또 재단사로 일을 하다 풍물단체에서 활동하며 학교와 일반단체를 대상으로 우리 전통문화를 보급하는데도 앞장서왔다.
지나온 삶이 궁금해 지난 18일 고산면 다목적문화센터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 기타 삼매경에 빠지다
고향은 고산면 삼기리 하삼마을이다. 故손일봉·한옥현 부부의 4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완주군농협조합장과 도의원을 지냈으니 지역에서는 꽤 유명인이었다. 부친의 형제들이 농토를 많이 가지고 있을 정도로 비교적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삼기초 시절, 인생의 진로를 바꿔놓을 만큼 옆집에 사는 형님의 기타 연주에 홀딱 반했다. 전주남중학교에 진학하자마자 오거리에 있는 전북기타학원에 등록했다.
“아버지가 학교에 내라고 준 육성회비를 학원비로 내 안 죽을 만큼 두들겨 맞았어요.”
1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3년 동안 기타학원에 다녔다. 당연히 공부는 뒷전이었고, 졸업과 동시에 최고의 기타리스트가 되기 위해 유학을 결심했다.
이후 부모님을 설득한 끝에 서울 서라벌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세광음악학원과 은파음악학원에서 기타를 배우며, 야간에는 강사로도 활동했다.
■ 음악 때문에 학업 포기하다
당시 “음악하는 사람들은 학벌이 필요 없다”라는 말을 듣고,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업을 중도 포기했다. 3학년 때부터는 의정부와 동두천, 용산 등 미군부대 영내 클럽에서 밴드활동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담임선생님의 말을 잘 듣고 학교를 더 다녔어야 했는데...그때는 잘 몰랐어요. 후회되죠.”
1974년 5월, 군에 입대해 35개월 동안 3군사령부 군악대에서 복무했다. 전역 후에는 일반 홀에서 일을 했지만, 당시 ‘딴따라’라며 소근대는 동네 주민들과 어머니의 심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다른 길을 택해야 했다.
마침 서울에서 의상실을 하는 외숙모의 권유에 따라 재단하는 일을 배웠다. 얼마 뒤, 다시 전주로 내려와 중앙동에 있는 사슴의상실에서 재단사로 꽤 오랫동안 일을 했다.
일을 하면서도 허전했다. 늘 악기를 만졌던 터라 마음 한 켠에서는 음악이 꿈틀 거렸던 것. 그래서 의상실에서 일을 하다 잠시 쉴 때면 3층 옥상에 올라가 장구를 치면서 허전하고 외로운 마음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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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주전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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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상실 재단사로 일하다
의상실에 근무하면서 아내 조미영(65)씨를 만나 스물여덟 살에 결혼했다. “내가 당시 큰 의상실에 재단사라서 배우러 오기도 하는데 아내도 그렇게 해서 만났어요.” 전주에서 결혼하고 큰 아들 승보(43)군이 두 살 때 고산 시골집으로 내려왔다.
결혼 후에도 의상실에 다녔지만 살림살이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의상실을 그만두고 소를 키웠다. 하지만 소 파동이 일어나 남는 것 없이 처분했다.
되는 일이 없었다. 어째든 먹고 살아야 하기에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삽자루 한 번 잡지 않았는데 사방공사를 하는 곳에 가서 일도하고, 도랑 보수도 다녔는데, 담뱃값도 안됐어요.”
‘다시 재단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익산의 한 의상실로 갔다가 얼마 안돼서 예전에 다녔던 전주 사슴의상실로 와 일을 했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시간이 남을 때마다 장구를 쳤다. 그 무렵, 다가동 다리 건너기 전 불교용품을 판매하는 건물 지하에 전주대 학생들이 만든 ‘새뚜기’ 라는 풍물단체에 들어가 활동했다.
당시 전주에는 새뚜기를 비롯 도내 4개 대학 학생들이 만든 풍물단체가 있었는데, 단체마다 초등학교 교사들도 가입돼 활발한 활동을 했다.
“일이 끝나면 저녁에 가서 연습하고, 낮에도 공간이 비어 있어 한 번씩 가서 장구를 쳤어요.” 거의 매일 밥 먹듯 하다 보니 기량은 일취월장했다. 저녁마다 풍물을 배우려는 사람들도 덩달아 늘었고, 풍물 단체 고문 역할까지 맡았다.
어느 날, 한 여성이 다가와 그에게 “고산면 삼기리 살지 않느냐”고 물었고, 삼기초 교사라며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몇 달 뒤, 삼기초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삼기초 선생님들에게 풍물을 가르쳐 주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이 일이 인연이 돼 1994년도부터 도내 학교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풍물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해 임실 필봉농악 설장고 중요무형문화재(제11-마호)인 박형래 선생과 함께 임실 삼계초등학교, 고산 삼기초등학교에서 사물놀이와 풍물을 각각 지도했다.
■ 풍물 보급에 앞장서다
의상실을 다니면서 오토바이를 타고 틈틈이 학교를 다니며 풍물을 가르치고, 대회 때마다 좋은 성적을 내다보니 자연스럽게 완주군에 ‘유능한 강사’로 소문이 났다.
완주 뿐 만 아니라 30년 가까이 전주와 진안, 무주, 순창 등 도내 29개 학교에서 풍물지도하면서 전북은 물론 전국 대회에서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상을 받았다.
특히 그가 가르친 학교 가운데 고산중학교의 경우 완주군대회에서 12회 연속 우승, 도교육청대회에서도 6회 금상 수상, 그리고 전국대회 대상을 차지했다.
“저는 학생들이 어떻게 하면 우리 전통을 잘 이해하고 배울 수 있는 지에 역점을 뒀습니다. 그 결과 좋은 성적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탁월한 지도력 덕분에 큰 상을 휩쓸었지만 거의 대부분 무료 강습이고, 학교장과 교육장, 교육감으로부터 감사장과 감사패를 받는 게 전부였다.
그는 또 전북무형문화제 제7-2호인 정읍농악 설장고 이수하는 등 우리 것을 배우고 일반단체에 보급하는데도 열정을 쏟았다.
실제 그는 1995년 호남좌도 풍물굿연구회 자문위원, YMCA풍물반 강습, 완주군 농악단 지도교사, 전북도민 문화예술 완주군 농악강사, 한국국악협회 완주군지부 농악강사로 활약했다.
또한 고산면 농악단을 비롯 소양면 농악단, 상관면 여성농악단, 봉동아름다운풍물단, 동상면농악단, 화산면주민자치센터 농악반, 운주 원고당마을 농악단, 운주면 지개장단, 비봉 천호경로당 농악단, 구이면 화원마을 농악단 등 많은 풍물단체를 지도하며 우리 전통문화 보급에 앞장섰다.
“익산, 김제, 정읍, 서울, 구례, 남원 등 가르쳐 달라는 곳이면 어디든 갔어요. 지금까지 세어 보니 거의 30개 정도 일반단체를 가르쳤더라고요.”
뿐만 아니다. 완주문화의집, 한일장신대 장애인센터, 장애인부모회 완주군지부 등 장애인을 대상으로 풍물을 교육하는 등 성별, 나이, 계층 가리지 않고, 불러주는 곳이면 언제든 달려갔다.
■ 땀과 열정, 결실을 맺다
개인이 받은 성적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다.
주요 성적을 보면 2002년과 2020년, 2017년 시군 농악경연대회에서 상쇠와 단장으로 참가, 대상을 거머쥐었고, 2002년 전북대회 사물놀이 지도자상을 비롯 2002년 전라예술제 전국 사물대회 지도자상, 2003년 전북대회 도지사 지도자상, 2004년 전북대회 사물놀이 교육감 지도자상, 2004년 전국예능 경연대회 타악 지도자상, 2007년 전국 무용 국악예술제 타악(설장고)1위, 2007년 국악대상(농악), 2009·2010년 전국 국악경연대회 및 전국대회 지도자상 등 수없이 많다.
이밖에도 지난 2017년 한국예총으로부터 예술문화공로패를 받았고, 전국연합방송(2019년)·완주예총(2020년) 공로패, 그리고 지난 해에는 완주농악단장으로서 완주 전통 농악을 도내에 알리고 완주군민의 국악 향유 수요를 만족시킨 공로로 2021 완주군민대상(문화·교육 분야)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는 현재 전승학교 주강사를 비롯 고산농악단장, 완주군농악단장, 한국국악협회 완주군지부장, 완주문화원 이사 등 우리 전통문화를 알리는 일 외에도 고산파출소 생활안전협의회장 등 주민들의 일상생활과 관련한 일에도 관심을 갖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 전통문화 잇고 싶다
적어도 도내에서는 국악과 양악을 섭렵하며 음악분야에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인기를 얻고,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한때 목숨을 잃을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지금은 딸기 농사를 25년째 짓고 있지만 이전에는 수박 농사도 지었어요. 아마 사고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수박 농사짓기 전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전주에서 승용차와 충돌하고, 5년 뒤 고산 전북푸른학교 인근 도로에서 승용차가 중앙선을 침범해 그가 운전하던 오토바이를 들이받아 수술을 받았다.
그때 사고 여파로 일상생활 하는데 불편하지만 풍물을 가르치고, 보급하는 데 적극 나설 정도로 전통 문화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깊다.
앞으로 오랫동안 식지 않고, 힘이 닿는 데까지 이어가고 싶은 게 그의 소박한 꿈이다.
또 하나, 곁에서 늘 응원군이 되어주는 아내와 제 갈길 꿋꿋이 걷고 있는 아들 승보군과 딸 숙의(40)양이 지금처럼 행복하고 건강했으면 하는 바람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