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손’, ‘쿵짝인생’, ‘고로해서’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대중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트로트 가수 현진우(48)씨.
지난 1999년 1집 앨범 ‘그사람이 보고 싶다’를 내며 가수로서의 첫 걸음을 내디뎠으니, 올해로 데뷔 24년차 중견 가수다.
그는 최근 채널A ‘금쪽같은 내 새끼’에 출연, 다둥이 아빠의 육아 현실을 보여주면서 화제를 모았다.
또한 KBS1 ‘아침마당’과 ‘가요무대’등 물오른 입담과 가창력을 뽐내며 스튜디오와 행사장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다.
대형기획사와도 계약을 맺으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그가 바쁜 스케줄을 뒤로 미루고 지난 달 1일 완주군을 방문했다.
바로 ‘완주명예군민’ 자격으로 유희태 군수 취임식에 초대 받아 참석하게 된 것.
사실 그의 고향은 전남 목포시 신안군이다. 하지만 ‘제2의 고향’이라고 부를 만큼, 완주군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실제로 그는 완주군과 인연을 맺은 뒤 불우이웃 돕기, 장학금 및 기부금 기탁, 무료 공연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눔과 선행을 꾸준히 실천해 오고 있어 지역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다.
특히 지난 해 3월에는 2021년~2022년 완주방문의 해 선포식을 통해 완주라는 이름에 대한 자긍심과 명예를 높인 공로로 명예군민증서를 받기도 했다.
올 하반기에는 완주를 홍보하는 내용을 담은 ‘완주따라 바람따라’앨범을 내고, 로컬&와일드푸드축제 때 단독 콘서트도 열 계획이다.
공교롭게도 구이면이 고향인 아내를 만났으니 완주와는 우연이 아닌 깊고, 귀한 인연임에 틀림없다. 현진우씨와 만나 인터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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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주전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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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완주와 인연을 맺게 됐나?
“공개방송이 끝나고 내가 개인적으로 형님이라 부르는 유희성 완주군주민자치위원회연합회장님, 현재 완주군팬클럽을 이끌고 있는 박병기 회장님과 조촐하게 식사자리를 갖게 된 후로 친해졌다. 희성이 형님은 나를 친동생처럼 아껴주고 챙겨준다. 가족만큼 사랑하는 형님이다. 벌써 10년이 넘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완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희성이 형님을 비롯해, 상배 형님 등 지인들과, 박성일 전 군수님을 알게 되면서 완주군에 대해 관심을 조금씩 갖게 되었다. 유희태 군수님이 새롭게 취임했는데 다양한 활동을 통해 민선8기 완주군정에 미약하나마 힘이 되고 싶다.”
▲나눔과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어느 날 희성이 형님이 나에게 ‘완주에서 봉사활동 많이 하고, 장학금도 기탁하면 좋지 않겠냐?’고 제안을 해줬다. 나도 좋은 일이라 흔쾌히 하겠다고 약속했고, 작지만 매년 꾸준히 하고 있다. 덕분에 박성일 군수님 재임 때 명예완주군민 증서도 받는 영광도 얻게 됐다.”
▲그간 완주군에서 어떤 활동들을 했나?
“내 입으로 직접 이야기 한다는 게 부끄럽지만 6년 전부터 완주애향장학금을 기탁하고 있다. 또 완주군 헬기노선 반대대책위가 주최한 기금 마련 바자회에 무료공연으로 힘을 보태줬다. 작년에는 완주 방문의 해를 기념해 열린 가요사랑 콘서트에서 500만원을 기부했다. 이날 완주사랑 노랫말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임대열씨의 노랫말 ‘완주따라 바람따라’ 음원을 제작해 처음 공개하기도 했다. 의미가 있었던 것은 완주 평화의 소녀상 건립에 200만원을 기부했다는 것인데, 완주에 와서 소녀상을 볼 때 마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특히 내 인생에 있어서 완주명예군민증을 받고, 완주군주민자치위원회 홍보대사로 활동할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돼 감사할 따름이다.”
▲완주명예군민이 됐다. 어떤 의미가 있나?
“명예군민이라는 호칭은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다. 특별하기 때문에 기쁘기도 하지만 어깨도 무겁다. 처가가 구이면이다. 명예군민이 됐다고 장모님께 말씀 드렸더니 무척 기뻐하셨고, 자랑스러워 하셨다. 앞서 얘기 했듯이 완주는 이름만 알았지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희성이 형님 알기 전부터 삼례딸기축제에 와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때도 솔직히 삼례가 전주인지 알았다. 고향이 전남 목포지만 완주에서 좋은 사람들을 알게 되고 좋은 일도 함께 하면서 고향 보다 더 완주군에 애정을 갖게 됐다. 무엇보다 완주명예군민이 된 만큼 이제는 어디에 가서도 제2의 고향은 완주군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완주군을 홍보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
▲‘완주따라 바람따라’노래도 발표했다. 계기는?
“완주를 홍보하는 노래가 없다. 자꾸 희성이 형님을 이야기 하는데 ‘완주 노래나 만들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해서 노랫말 공모전을 통해 ‘완주따라 바람따라’음원을 제작했고 작년 콘서트에서 처음 공개했다. 소속사에 이 곡과 함께 여러 곡을 음반에 함께 수록해서 만들 예정이다. 나오는 대로 완주군에 1천장 정도 기부할 계획이다. ‘완주따라 바람따라’마지막 부분에는 ‘비비정 철길따라 돌아와 주오’라는 노랫말이 나온다. 대둔산 케이블카도 들어있다. 특정지역을 넣는 게 가수로서는 심적 부담이 되지만 완주를 홍보하는 노래인 만큼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부르겠다.”
▲대형 소속사와 계약했다. 완주에서 활동이 줄어들 텐데
“작년 11월에 소속사에 들어갔다. 연예인이 소속사에 들어간다는 것은 결혼하는 것만큼 중대한 일이다. 소속사와 끝나면 이혼에 가까울 정도로 타격이 크다. 때문에 고민 끝에 들어갔다. 소속사 대표님은 굉장히 지성인이다. 대표님이 계약할 당시 요구사항을 물어봤는데, 방송출연 등 여러 개를 말씀 드린 다음 예외 조항을 이야기 했다. 알다시피 소속사는 출연료를 책정해 놓으면, 10원도 안 깎아 줄 정도로 엄격하다. 잔인할 정도로 연예인을 엄격히 관리한다. 단, 희성이 형님을 포함해 고향의 몇 분, 다시 말해 내게 아주 소중한 분들이 부르면 고려해 달라고 대표님께 부탁했다. 완주는 내 고향 목포, 신안에 버금갈 정도로 애정이 있는 지역이다. 유희태 군수님 취임식 때도 스케줄을 뒤로 미루고, 내돈으로 기름 넣고, 통행료 주고, 그냥 한걸음에 달려왔다. 완주는 내게 그런 곳이다.”
▲원래 꿈이 가수였나?
“가수가 되겠다고 막연하게 꿈을 꿨다. 학창시절에는 주로 앞에서 리더 역할을 많이 했다. 가수하고 공부 빼놓고 일등을 다 해본 것 같다. 제주관광대학 카지노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제주KAL호텔에서 딜러로 일했다. 어느 순간 회의감을 느껴 그만두고, 장녹수를 작사한 박성훈 선생님을 알게 돼 가수의 길을 걷게 됐다.”
▲부모님에 대한 효심이 애틋하다.
“내가 3남 2녀 중 막내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지 50일 만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지난 5월에 세상을 떠나셨다. 솔직히 말해 아직도 슬픔이 가시지 않았다. 내 나이 48살이 되도록 가족이 떠나는 고통을 처음 겪어봤다. 코로나가 풀리고 관객이 2천명 이상이 몰리는 무대다운 무대였다. 메이크업도 하고, 머리도 꾸미고, 의상도 입었는데 아내로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슬픔을 억누르고 무대에 올랐다. 목포로 실려온 어머니 모습을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께서는 가수하는 것을 응원해 주셨다. 얼마 전 가요무대 녹화를 했는데 어머니가 내 노래를 들으면서 좋아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볼수 없다고 생각하니 힘이 나지 않았다. 가요무대에서 불렀던 ‘대전부르스’를 어머니와 함게 노래방에서 불렀던 영상이 있다. 어머니 18번이었다. 어머니는 기독교인이다. 찬송가 중 493장 ‘하늘가는 밝은 길이’란 곡을 자주 불렀다. 추도예배를 드리는데 그 노래가 그렇게 슬픈지 몰랐다. 돌아가신 후 매일 저녁 잠들기 전에 그 찬송가를 듣는다.”
▲앞으로의 바람, 그리고 계획은?
“먼저 내 허물을 끌어 안아준 아내와 금쪽같은 6명의 자녀, 우리 가족 8명 모두가 행복하고, 건강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한 외롭던 무명가수 시절, 내게 ‘기대한다’라는 말 한마디로 큰 용기를 줬던 배우 임동진 선배님처럼 나 역시 시간이 흘러 후배들로부터 ‘저 선배 따뜻했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가수가 되고 싶다. 그리고 변함없이 완주를 사랑하는 가수가 되겠다. 매니저와 가끔 이야기 하지만 은퇴하면 완주군에 집 짓고 살고 싶다. 또한 지금까지 적은 액수지만 나눔활동을 해왔는데 힘이 닿는 데까지 계속 이어가고 싶다. 마지막으로 현진우라는 가수, 꼭 기억해 주고, 사랑해 주길 바란다. 좋은 노래로 보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