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태(67)사단법인 일문구의사 선양사업회 이사장이 지난 달 21일 국가 사회 발전에 이바지 한 공로로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유 이사장은 일제 강점기 한 집안에서 독립운동가 9명을 배출한 가문의 후손으로, 매년 순국의 날에 추모행사를 개최, 지역사회와 함께 독립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에 앞장서왔다.
뿐만 아니라 민들레포럼을 설립, 민들레홀씨 장학금을 수여하는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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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주전주신문 |
▲ 국민훈장 목련장 받았는데요. 소감 한 말씀
= 큰 상을 받게 돼 영광입니다. 더욱 책임감과 사명감, 그리고 소명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선조님들의 명예를 국가에서 인정해줬다는 점에서 더 없이 기쁩니다.
▲ 완주군 곳곳에 축하하는 현수막이 많이 게시됐던데요.
= 네. 소식을 듣고 전화도 해주시고, 정말 많은 분들이 축하해줘서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언론사에서도 인터뷰 요청도 해주시고 관심 있게 보도해 주셨는데요. 지면을 빌려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드립니다.
▲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일문구의사(一門九義士) 선양사업회는 어떤 단체인가요?
= 일문구의사는 한 가문에서 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해 붙여졌습니다. 2009년부터 추진해 사단법인으로 설립했고, 역사의 현장에서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정신으로 과거 의병의 애국정신을 후세에게 알리는데 목적을 두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 그간 어떤 사업들을 해오셨나요?
= 매년 순국선열의 날인 11월 17일 오후 3시에 일문구의사 비문이 있는 비봉공원에서 추모행사를 열고 있습니다. 순국선열의 날에 개최하는 것은 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된 을사조약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추모행사 후에는 불우한 학생들에게 민들레홀씨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고요. 특히 화환 대신 쌀을 받아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달하는 등 나눔 활동도 함께 전개하고 있습니다.
▲ 일문구의사 추모사업이 지난해 1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회 ‘국민참여 기념사업’에 선정됐는데요.
= 네. 맞습니다. ‘국민참여 기념사업’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회를 국정사업으로 추진하고, 미래 100주년을 설계하여 자주독립정신을 계승하고 발전하고자 하는 의미로 진행되는데요.
일문구의사선양사업회가 매년 시행하는 일문구의사 추모사업이 ‘국민 참여 기념사업’으로 선정된 것 또한 역사를 후세에 알려 나라사랑하는 마음과 민족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 우리 사업회가 2016년부터 완주지역 학생들을 추모행사에 초청하고 있는데요. 이는 순국선열의 희생정신을 후손들에게 알리는 등 교육적 현장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 일무구의사를 배출한 고흥유씨 가문에 대해 소개해 주시죠.
= 본관은 고흥 유씨입니다. 세종대왕때 대마도를 정벌했던 유습장군의 후예로, 독립운동과 3.1운동이 상징이 된 유관순 열사의 뜻을 이어받은 가문입니다. 저는 고흥 유씨 제29대 손입니다. 일문구의사님 가운데 의병활동을 하셨던 고 유영석 님은 저의 증조할아버지가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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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 가문은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제의 탄압과 감시 등 고초도 많이 겪었을텐데요.
= 9분 중 유치복 대장님은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금마헌병대에서 즉결 처형 당하셨고, 8분은 옥고를 치르다 옥사를 하시거나, 출옥 후에 형독으로 돌아가시는 등 비참한 생활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4가정은 ‘멸문지화(滅門之禍, 한 집안이 다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재앙)’됐고, 5가정은 연락이 되고 있습니다.
해방의 기쁨을 맞이했지만 대다수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던 집안은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비참한 삶속에서도 비굴하지 않고, 자부심은 매우 강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이사장님도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 자랐다고 들었습니다.
= 어렸을 때는 가정이 어려워 밥을 못 먹고 개구리를 잡아 몸통은 닭에 주고, 배고파서 개구리 뒷다리를 몰래 구워먹던 기억이 납니다.
나이가 들면서 선조님들이 ‘풍찬노숙’으로 살아오신 삶을 생각하면서 아무리 어려워도 독립운동 정신만 가지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자신감,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항상 갖고 살아왔습니다.
▲ 청소년기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 중학교에 들어갔으나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시집간 누나에 집에서, 또는 형님 집에서 전전긍긍하면서 보냈고, 중학교 졸업 후에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가려고 부모님을 찾아갔는데 “우리 집 형편으로는 고등학교 보낼 힘이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도 상업학교에 가게 해 달라고 사정했지만 허락을 받지 못했죠. 이후에 상고시험 후 장학생으로 선발돼 진학하게 됐습니다.
▲ 행원으로 출발해 기업은행 부행장까지 오르셨는데, 비결은 무엇일까요?
=영업점에서 행원에서 대리, 차장, 지점장, 본부장, 부행장까지 하고 퇴직했어요. 중간에 노조위원장을 하는 동안 노사상생을 위한 조합을 이끌어 산업포장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행원 때 은행장 표창을 8번, 지점장 시절에는 대통령 산업 초장 수상 등 가는 지점마다 1등을 하다 보니 ‘일등제조기’라는 별명도 붙었습니다.
여기에다 상고출신, 노조위원장 출신으로 처음으로 국책은행에서 부행장이 되는 행운을 얻었고요.
부행장에 오른 것은 “진심으로 일하면 누군가가 나와서 도와 준다”라는 저의 일에 대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고객을 왕 같이’, ‘은행문턱 낮추기’를 일하는 신조로 삼고 앞만 보고 달려왔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 은행 다니면서 공부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은행에 들어가 야간대학에 다니려 했는데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포기하고, 마침 설립된 방송통신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하게 됐죠. 그러나 가정형편으로 공부를 못한 것이 한이 맺혀 야간대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등 꾸준히 주경야독 했습니다.
▲ 고향에 민들레동산을 조성했는데요.
= 고등학교 2학년 때 교회에서 저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제 별명을 일편단심 ‘민들레’라고 붙여 줬던 계기가 됐는데, 꽃말이 ‘사랑’, ‘행복’입니다. 기업은행 퇴직 후 고향에서 사랑과 행복을 전파하며 사람들과 나누며 살고 싶어 이름을 민들레 동산이라고 지었습니다.
현재 민들레동산 힐링센터를 조성해 메타스퀘어 등의 나무를 심고 캠핑장을 만들었습니다.
또 민들레를 이용해서 차와 국수도 만들어 팔고 있습니다. 이곳이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명상하고 기도하는 장소가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 민들레포럼은 어떤 목적으로 설립하셨나요?
=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니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민들레 포럼입니다. 민들레 포럼에서 민들레홀씨 장학금을 만들어 어려운 학생들에게 매년 지원하고 있는데요.
현재까지 420여명의 학생에게 1억 4천 여 만 원 정도 지원한 것 같습니다. 추모행사에서 화환대신 10kg기준해서 사랑의 쌀 3,500포대를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달했고요. 기금은 저와 뜻을 같이 하는 민들레 회원님들과 후원자님들이 함께 만들고 있습니다.
▲ 끝으로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과 지면을 통해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 우선 지금까지 어려운 환경을 견뎌내며 부행장, 그리고 사회단체를 운영하는 이사장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곁에서 항상 든든한 후원자가 돼준 제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지역에서 일꾼이 되어 봉사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은 게 저의 꿈입니다.
평온한 바다는 유능한 선장을 만들 수 없듯이 힘들고 어려운 역경은 더 큰 축복을 받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코로나19가 장기화하고 있는데요. 독자 여러분! 조금 더 힘내시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