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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꽃은 나의 연인… 평생 바쳐 최고 식물원 세워

원제연 기자 입력 2021.04.16 11:21 수정 2021.04.16 11:21

(특집 / 용진 중앙식물원 심정섭 대표)
대한민국 최고 화훼농가들로 엄선… 꽃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자부심 가져
15년 동안의 오랜 연구끝에 개발한 ‘중앙식물원표’ 흙… 소비자 신뢰 얻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195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김춘수(1922~2004)시인의 ‘꽃’이라는 시 일부다.

이 시를 읊조리다 문득 떠오른 곳이 있어 가던 길을 멈추고, 무작정 핸들을 돌렸다.

도착한 곳은 용진중앙식물원(대표 심정섭). 국내 최대 규모로 손꼽힌다. 그러니 웬만한 꽃과 식물은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것도 모자라 ‘명품’으로 선별·전시했는데, 가격은 저렴하다. 때문에 평일, 주말 상관없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4월의 한복판에서 심정섭(70)대표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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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과 인연을 맺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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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함께 평생을 살아서 일까? 환한 웃음이 꽃을 닮았다. 첫 만남에서“비싼 얼굴 아무에게나 안보여 준다. 초상권 침해니 광고모델료를 줘야한다”며 농담을 건네는 모습에서 상대방의 호흡을 조절할 줄 아는 내공도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일흔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목소리에 힘과 자신감이 묻어났고, 성공한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여유까지 가졌다.

개인으로서는 대한민국 최대, 그리고 최고 식물원이라고 자부할 만큼 시설은 물론 시스템, 경영까지 인정받고 있는 심정섭 대표.

그의 고향은 구이면이다.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6살 때 평화동으로 이사했다. 부친은 돼지와 닭을 키우면서 남부시장에서 미곡상도 했다. 어려운 시기였지만 비교적 윤택하게 살았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핸가 뉴캐슬병이 돌아 키우던 닭이 다 죽고, 같은 해 돼지 콜레라까지 번지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졌다. 설상가상 부친이 많은 돈을 떼이고, 그 충격으로 건강이 나빠졌다. 이로 인해 경원동으로 집을 옮겼고, 부친의 투병생활로 어머니가 미곡상을 대신 운영했다.

심 대표도 4학년 때 이사 오면서 풍남초로 전학했다. 12살 때 부친의 권유로 태권도를 배웠고, 13살 때 전라북도 최연소로 승단시험에 합격했다.

중학교에 입학, 태권도 선수로 종별선수권에 처음 참가해 3위에 입상했지만 전국체전 등 희망을 이어갈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아 선수생활을 접었다.

그리고 꽃과 식물 전문가의 토대가 된 전주농고 원예과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진학에도 부친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과 혜안이 크게 작용했다.

“미곡상을 할 때 리어카에다 꽃을 갖고 다니는 어른들의 소득이 상당히 높았는데요. 그걸 보시고는 아버지께서 ‘앞으로 꽃의 시대가 올 것’이라며 저에게 원예과를 추천해 주셨습니다.”
ⓒ 완주전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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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집, 사업의 첫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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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원예과에 들어가니 꽃을 공부하는 시간이 정말 즐겁고, 재미있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꽃에 대해 점점 흥미를 느끼면서 진로도 확고해졌다.

“번식에 관심이 많았고, 다른 친구들보다 창의적인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집에서 200미터 떨어진 정원수 농장을 거의 매일 밥 먹듯 찾았다.

어린나이에 기특했는지 사장은 심 대표에게 꽃꽂이 방법도 알려줬다. 인근 아중리에 있는 화훼농가도 자주 놀러갔다. “꽃과 잘 맞았어요. 친구들과 놀러다니는 것보다 꽃과 관련된 곳을 많이 다닐 만큼 꽃에 열정이 많았죠.”

고등학교 3학년 때 인후동으로 이사 와서부터 꽃과 식물에 프로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21살 때 묘목으로 200만원이라는 큰돈을 벌었다.

이듬해 10월 군 입대 전에 심은 가이즈까 라는 향나무를 2년 뒤 부친이 팔아 450만원을 손에 쥐었다.

25살에 전역해서 27살까지 묘목사업을 해서 제법 많은 돈을 벌었지만 몸을 혹사시킨 나머지 이듬해 관절염을 앓고, 2년동안 투병생활을 했다.

“제대하고 나와 회향목 씨를 뿌렸는데 발아율이 좋아 그때 돈 80만원을 벌었고, 그해 기리시마 철쭉, 4월에 피는 히노데 철쭉, 일본말로 왜철쭉을 1만개 넘게 꽂아서 몇백만원의 소득을 올렸죠. 근데 묘목을 심으려니 앉고 일어서고를 반복해야 하잖아요. 관절염이 온거죠.”

몸이 조금씩 회복해졌지만 더 이상 묘목사업을 할 수가 없다고 판단했다. 군 입대 당시 묘목사업으로 번 돈으로 모친이 삼천동에 땅을 샀는데, 모 시내버스 회장이 학교를 신축한다고 해 다시 팔았다.

그 돈으로 경원동 당시 한국통신 옆에 자그마한 꽃집을 마련했다. 29살 때다. 그 무렵 아내와 결혼했다. 9년 동안 발품을 팔고 성실히 노력한 결과, 군부대와 법원 등 몇몇 곳을 제외하고 전주시내 관공서를 고객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1988년 말까지 꽃집을 운영했다. 잘 되고 있는 꽃집을 접게 된 이유는 꽃가게 주인으로 인생을 마치기 싫어서 였다. 마침 그 해 12월 어느 날, 이름 만 들어도 알만한 전주의 한 주택건설 회장이 심 대표가 가게를 접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아파트 사업을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돈은 벌 수 있었겠지만 자신감도 없었고, 갈 길이 아니라고 판단했어요.”

뿐만 아니다. 그가 관공서를 납품하는 능력을 보고, 고사동의 복싱, 레슬링, 태권도를 했던 큰 체육관에 구입했는데 그 곳에서 꽃시장을 함께 해보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역시 거절했다.
ⓒ 완주전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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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련 겪고 꽃 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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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원동 꽃집을 정리하고, 1989년 1월 용진읍에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묘목을 심고, 광주와 서울 등 전국을 다녔지만, 팔 곳이 없었다. 더욱이 시세보다 비싸게 토지를 매입하는 등 악재까지 겹치면서 당뇨를 앓게 됐다.

“농사를 지어보니 희망이 없었어요. 땅에 심지 않고, 화분에 키우기로 마음 먹었죠.”

이 역시 규제에 가로막혔다. 땅에 심는 것은 농사로 인정하지만 화분에 심는 것은 장사로 규정해 많은 제약이 뒤따랐다.

당시 소주 한 두병을 마셔야 잠을 이룰 정도로 4~5년 동안 피가 마르도록 힘든 나날을 견뎌내야 했다.

어느 날, 농업기술센터 모 국장과 군청 실장이 찾아와 애로사항을 듣고 적극 도와주겠다며 용기와 희망을 선물했다. 은인이었다. 그들의 도움 덕분에 일본, 유럽, 네덜란드, 독일, 미국 등 선진지 견학을 통한 실질적인 재배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견학을 한 뒤 한국에 돌아가면 저렇게 해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어요.”

이후 운 좋게 지원 받은 벤처자금에다 자신의 돈을 보태 온실을 지었다. 짓고, 뜯고, 또 다시 짓고, 뜯고를 반복, 지금까지 온실에 투자한 돈만 30여 억원이 넘는다.

무엇보다 선지지 견학을 통해 얻은 큰 수확은 땅이 아닌 화분에 심는 방법, 그리고 흙의 조화가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왜 용진중앙식물원의 꽃은 오래 살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심대표가 15년 동안 개발해 완성한 흙에서 얻을 수 있다.

심 대표는 땅에 심지 않고 분화재배를 하는 유럽 등 선진지를 일찌감치 경험하고 돌아온 뒤, 자신의 노하우를 접목해 전국 최고의 유통센터로 성장시켰다.

이곳에서 재배한 꽃과 식물은 전국으로 유통된다. 유럽에서 들여와 번식해서 파는 꽃도 있다. 착근과 성장이 빠르고, 이식했을 때 잘 죽지 않는 장점이 있는 분화재배를 터득한 덕분이다.

코로나19영향이 없다. 오히려 성장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집에만 있다보니 뭔가 시각적으로 힐링하고 싶어 식물원을 찾고 있는데, 와서 보고 그냥 갈 수 없으니 2~3천원짜리 화분을 사가지고 가는 것 같아요.”

또한 중앙식물원에 있는 식물 97%는 대한민국 최고 농가들로 엄선해 납품했기 때문에 믿음이 간다. 실제 식물원에 들어서면 2개의 현수막에 “식물에도 명품이 있습니다”, “식물 하나에 혼을 담았습니다”라고 각각 써있는데, 바로 심대표의 꽃과 식물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여기다 앞서 말했듯 오랜 연구 끝에 개발한 ‘중앙식물원 표 흙’은 “저 집 꽃은 약을 안 좋은 것을 써서 오래 산다”는 악담이 나돌 정도로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저는 C급꽃을 갖다 유통마진을 많이 보지 않아요. 전국 최고의 A급의 꽃을 누구나 저렴하게 구입하도록 하는 것이 판매 방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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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은 영원한 나의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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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로 돌아가더라도 꽃을 선택하겠다는 심 대표. ‘꽃은 나의 연인이다’라고 말했던 이유가 다 있었다. 최고의 꽃과 식물을 찾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정신을 놓고 잠들었던 적도 많았다.

특히 ‘실패하면 목을 메겠다’는 성공에 대한 간절한 목마름은 이 분야 최고의 자리를 앉게 한 원동력이 됐다.

“식물원에 청장, 국회의원, 단체장 등 지위가 높은 분들이 많이 오는데, 저는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을 찾고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식물은 대나무처럼 생긴 종려죽이란다. 가격이 비싸고, 더위나 추위, 습기에 강한대신 번식이 안되는 게 특징이란다. 듣고 보니 그의 삶과 비슷하다.

그는 현재 용진읍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87년도부터 나눔에 관심을 갖고 실천했다. 그 당시 익명으로 한 구좌에 1천원 씩 30구좌를 매달 성당에 후원했다.

성당에서 큰돈의 후원자를 알아내려고 해 결국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장모로 인해 밝혀지기도 했다.

또한 용진읍에 한 달에 2만원씩 10명에게 후원하고, 외식상품권, 교통카드, 전기장판, 실버카 등 다자녀가정과 저소득세대 및 학생, 독거어르신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지역사회 공헌에 앞장서고 있다.

부족한 자신 곁에서 묵묵히 인내하고 살아준 아내 김옥희(66)씨에게 항상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는 심 대표. 사실 그는 남자들의 적이다.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아내를 여왕처럼 대접해 주기 때문이다. 앞으로 변함없이 살겠다는 그를 응원하며 끝맺음말로 인터뷰를 마친다.

“코로나19로 모두가 어려운데요. 함께 힘을 모은다면 코로나도 물러가고 일상도 회복할 겁니다. 용진중앙식물원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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